"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 프라그마티즘이 지배하는 2026년 중동의 전쟁과 평화

미국이 낳은 실용 철학이 어떻게 호르무즈 해협과 휴전 협상 테이블을 움직이는가

적이 중재자가 되는 곳 - 2026 중동 전쟁이 증명한 실용주의의 민낯

휴전은 평화인가, 흥정인가 - 사막 위에 그려진 프라그마티즘의 두 얼굴

▲ AI 이미지,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제공

전쟁의 한복판에서 가장 차가운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그래서,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는가?" 명분도, 이념도, 신앙도 아닌 오직 '실질적 결과'를 묻는 이 한마디가 2026년 중동의 운명을 흔든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태어난 프라그마티즘(Pragmatism), 곧, 실용주의는 절대적 진리보다 현실의 효용을 진리의 잣대로 삼는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 철학의 가장 잔혹하고도 적나라한 실험장이 바로 중동이다. 나는 이 글에서 사막의 모래 위에 그려진 실용주의의 두 얼굴을 따라가 보려 한다.

 

진리를 '연장'으로 본 사람들

 

먼저 그 뿌리를 짚는다. 1870년 무렵 미국 매사추세츠의 지적 모임 '메타피지컬 클럽'에서 이 철학의 불씨가 지펴진다. 찰스 샌더스 퍼스(1839~1914)는 1878년 「우리의 관념을 명료하게 하는 법」에서 '실용적 격률'을 세운다. 한 개념의 의미는 그것이 현실에서 낳는 실질적 효과의 총합이라는 발상이다. 윌리엄 제임스(1842~1910)는 1907년 『실용주의』를 통해 이를 세상의 상식으로 만들었다. 삶에 유익한 효과를 내는 관념이 곧 진리라는 신념이다. 존 듀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지식은 박제된 정답이 아니라 환경과 부딪치며 문제를 푸는 살아 있는 과정이며, 진리는 고정된 황금이 아니라 손에 들린 '연장'이라는 도구적 진리관을 완성한다.

 

이 사유가 국경을 넘어 외교의 옷을 입으면 강력한 생존술이 된다. 고정된 이념보다 실질적 국익을 앞세우고,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차가운 원칙에 따라 어제의 적과도 오늘 손을 맞잡는다. 중동만큼 이 원리가 날 것 그대로 작동하는 무대도 없다.

 

사막 위에서 작동한 실용의 셈법

 

2026년의 시간표를 펼쳐 본다. 2월 28일,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을 향해 대규모 공습을 감행하며 전쟁의 막이 오른다. 이란은 미사일과 드론으로 응수하고, 세계 원유의 길목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다. 이 봉쇄는 신념의 표현이 아니다. 철저히 계산된 지렛대다. 세계 경제의 숨통을 틀어쥐는 것보다 더 실용적인 협상 카드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4월 8일, 놀라운 장면이 펼쳐진다. 미국과 이란이 2주간의 휴전에 합의한 것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그 중재자가 파키스탄이었다는 점이다.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 또한 조용히 대화의 끈을 이어 갔다. 적대와 불신의 한복판에서, 누구든 쓸모만 있다면 중재자가 될 수 있다는 실용주의의 냉정한 진실이 여기 있다. 4월 16일에는 미국 중재로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휴전에 들어갔고, 트럼프 대통령은 곧 3주 연장을 발표한다.

 

그러나 실용의 셈법은 그만큼 위태롭다. 트럼프는 공습 중단의 조건으로 호르무즈 해협의 '완전하고 즉각적인 개방'을 내걸었고, 미국은 이란 항구로 향하는 선박을 겨냥한 해상 봉쇄로 맞불을 놓았다. 양측 어느 쪽도 봉쇄를 풀지 않았다. 이슬라마바드 협상은 끝내 결렬되었다. 휴전은 평화가 아니라 다음 계산을 위한 잠시의 멈춤일 뿐이었다. 5월 28일 미국과 이란이 잠정 합의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서명은 아직 허공에 떠 있다.

 

모든 것을 '쓸모'로 잴 때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춰 서야 한다. 실용주의 외교는 분명 사람을 살린다. 한 번의 휴전이 수많은 생명을 포화 속에서 건져 낸다. 레바논에서만 2천 명 넘게 목숨을 잃고 백만 명 넘게 집을 잃은 현실 앞에서, 그 잠시의 멈춤조차 얼마나 귀한가. 나는 실용의 지혜를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칼은 양날을 지닌다. 모든 것을 쓸모로만 잴 때, 끝내 흥정의 탁자 위에 오르지 말아야 할 것마저 거래의 품목이 되어 버린다. 가자지구에서 그어졌다가 옮겨지는 '옐로 라인'은 누군가에게는 협상 카드이지만, 그 선 안에 갇힌 2백만 명에게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다. 효용은 나침반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북극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중동의 비극은 어쩌면 너무 많은 이들이 효용을 북극성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멈춤과 평화 사이에서

 

나는 이 글을 마치며 한 가지 고백을 내려놓는다. 짧지 않은 시간을 중동에서 지내면서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의 갈라진 틈을 들여다보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나는 '휴전'이라는 단어 앞에서 늘 마음이 둘로 갈린다. 휴전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휴전은 평화가 아니다. 멈춤은 화해의 시작일 수 있지만, 더 큰 셈을 위한 숨 고르기일 수도 있다. 진정한 평화는 효용의 저울 위에서 측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적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눈에서, 셈할 수 없는 한 생명의 무게를 끝내 셈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로소 자라난다.

 

성경은 "화평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복음 5장 9절). 화평을 만드는 일과 휴전을 흥정하는 일은 닮았으되 절대 같지 않다. 지금 중동의 협상 테이블에 앉은 이들은 휴전을 거래하는 상인인가, 아니면 평화를 짓는 일꾼인가. 그리고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는 우리는, 쓸모와 진실이 갈라지는 그 갈림길에서 어느 쪽 편에 서 있는가?

작성 2026.05.30 20:30 수정 2026.05.3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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