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7월 29일, 미국 동부 시간 늦은 저녁이다. 폭스 뉴스의 간판 정책 토론 프로그램 '스페셜 리포트' 토론석에 묵직한 단언 한 줄이 떨어진다. 칼럼니스트 마크 티슨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단언이 채널을 가른다. "가자(Gaza) 인도주의 위기의 진짜 원인은 바로 이것이다."
그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는 의외로 이스라엘이 없다. 오직 하마스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협상과 ‘가자’ 원조 문제를 한자리에 놓고 분석하던 그 짧은 7분 52초의 영상은 한 도시의 운명에 대한 미국 보수 진영의 도덕 문법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 보인 장면이 된다.
티슨의 논거는 명료하기 그지없다. 그가 폭스 출연 직후인 8월 7일 『워싱턴 포스트』에 게재한 칼럼, 「가자의 굶주림은 많은 저자(著者)를 가지나, 이스라엘은 그중 하나가 아니다」는 그 방송 발언의 활자판이다. 그는 미국 후원으로 2025년 5월 출범한 신생 비정부기구 GHF(가자 인도주의 재단·Gaza Humanitarian Foundation)가 단 하루 만에 약 182만 9,520끼의 식사를 가자 주민에게 배급했고, 출범 이래 누적 약 1억 800만 끼를 분배했다고 단호하게 적는다.
이스라엘 방위군 산하 코갓(COGAT)이 발표한 '전쟁 발발 이래 약 190만 톤의 국제 인도주의 물자 반입'이라는 수치도 함께 인용한다. 그러고는 강력하게 묻는다. "자국을 침공한 세력의 주민을 전쟁 한복판에 먹여 살리는 나라가 인류 역사에 또 있었던가."
그러나 호흡을 좀 가다듬고 사실을 더 멀리서 응시해야 한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이 같은 7월 말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10월 개전 이래 ‘가자’에서 사망한 팔레스타인인은 5만 6천여 명을 넘는다. 다수가 여성과 어린이다. 2025년 7월 30일 기준 가자 영토의 약 87%가 이스라엘군 점령 구역 또는 이주 명령 구역에 묶여 있다. 휴전이 깨진 3월 18일 이후 약 76만 명이 또다시 강제 이주를 겪는다. 그뿐이 아니다. 7월 말 『인터셉트(Intercept)』와 로이터가 동시에 보도한 미 국제개발처(USAID) 내부 분석 결과는 한층 묵직하다. 2023년 10월부터 2025년 5월까지 미국 후원 원조의 156건 분실·도난 사례 가운데 하마스가 수혜자였다는 보고는 단 한 건도 없다.
국제위기그룹(ICG)이 같은 시기 펴낸 보고서 「가자 기아 실험(Gaza Starvation Experiment)」은 한발 더 나아간다. 감사를 통해 산출한 ‘원조 도난율(식량·의약품·연료·텐트 등 인도주의 원조 총량 가운데, 본래 수혜자인 민간인에게 닿지 못하고 무장 세력이나 약탈자, 암시장 등으로 빼돌려진 비율)’은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도리어 가자에서 가장 약탈을 산업적·조직적으로 반복 수행하는 최상위 약탈자(most prolific looter)'로 지목된 자는 이스라엘이 무장을 지원한 무장 조직 '아부 샤밥(Abu Shabab) 갱단'이라 적시된다.
그 사이, GHF의 분배 거점 인근에서는 또 다른 비극이 펼쳐진다. 5월 27일부터 두 달 동안 한 끼 식량을 구하려 모인 군중 가운데 1,239명이 목숨을 잃고, 8,152명이 부상한다(가자 보건부 발표·OCHA 인용). 칼럼니스트가 자랑스레 내건 1억 800만 끼라는 황금빛 숫자 뒤에는, 한 끼를 구하다가 쓰러진 1,239구(具)의 침묵이 어둡게 누워 있다.
양측의 주장은 평행선을 그린다. 톰 카튼n) 미 공화당 상원의원은 의사당 단상에서 "하마스가 약탈한 원조를 암시장에 되팔아 5억 달러 이상의 검은 자금을 챙긴다"라고 단언한다. 반대편의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는 2025년 3월 2일 이후 5개월 넘게 단 한 트럭의 물자도 들이지 못했다고 절규한다. 그뿐이 아니다. 약값이 끊긴 가자 시장에서 밀가루 1kg 한 봉지가 한때 미화 100달러를 넘긴 적도 있다는 OCHA의 7월 보고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한 가족의 한 끼 운명이 적힌 영수증이다. 한쪽은 도둑 잡는 일을 본질이라 말하고, 다른 한쪽은 도둑 핑계로 굶주림을 만든다고 외친다. 둘 다 일부는 사실이며, 또 둘 다 전부는 아니다. 진실은 늘 그러하다 - 깔끔한 단언보다 헝클어진 현실에 더 자주 깃든다.
우리는 여기서 한층 깊은 질문 앞에 선다. 전쟁의 도덕 문법은 어디서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가. 침략자의 주민을 먹이는 나라가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는 영웅인가, 아니면 사실은 점령자의 국제법적 의무를 마지못해 수행하는 통치자인가. 굶주린 어린아이가 어느 진영의 깃발 아래 누워 있느냐에 따라, 그 슬픔의 무게는 정녕 달라지는가. 티슨의 단호한 한 줄은 한 진영의 도덕 거울을 정성껏 닦아 준다. 그러나 그 거울의 뒷면에는 OCHA의 5만 6천 이름과, 1,239구의 식량 줄 침묵과, USAID 내부 보고의 156건 데이터가 함께 새겨져 있다. 거울 한 면만 들여다보고 돌아서는 사람은, 결국 거기서 자기 얼굴만 보고 만다.
가자의 한 어머니가 비어 가는 분유통을 흔들며 우는 새벽과, 텔아비브의 한 노모가 인질로 잡힌 아들의 사진 앞에서 무너지는 저녁이, 결국 같은 하늘 아래의 같은 무게임을 알기 때문이다. 신학적 분별에서 우리는 다른 자리에 설지언정, 인간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같은 흙으로 빚어진 한 종족이다. 어느 한쪽만의 슬픔을 '진짜 슬픔'이라 명명하는 순간, 우리는 슬픔 그 자체를 모독하게 된다. 한 줄의 명쾌한 단언은 시청률을 올리지만, 그 단언이 한 어린이의 마지막 호흡 위에 깃발처럼 꽂힐 때, 우리는 그 깃발 아래 무엇을 새로 세웠는지 끝내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자’ 인도주의 위기의 '근원'을 묻는 일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그 답이 곧 한 도시 폭격의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그 답이 약탈자와 인질범의 보호막이 되어서도 안 된다. 7분 52초짜리 한 토론과 한 어린이의 마지막 호흡 사이에서,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는 결국 어느 자리에 무릎을 꿇을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