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비전 2030' 프로젝트의 화려한 몰락

1조 달러가 흩어진 자리 — MBS의 '비전 2030'이 사막 위에 남긴 디지털 폐허의 정체

500m 거울 마천루의 추락 — '더 라인' 무기한 연기, 사우디는 무엇을 잃었는가

카자흐스탄에 빼앗긴 동계올림픽 — 비전 2030의 '판타지'가 '리얼리즘'에 무릎 꿇는 순간

▲ AI 이미지,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제공

역사상 절대 군주들은 권력의 정점에서 거대한 돌무더기를 쌓아 올렸다. 페르세폴리스의 부서진 기둥, 카르나크의 모래에 묻힌 신전, 페트라의 붉은 사암 도시가 그러하다. 중동의 비옥한 평원과 황량한 사막은 그 영광의 잔해를 묵묵히 품어 왔다. 그런데 21세기의 한 군주는 사뭇 다른 길을 걷는다. 그의 야심은 어쩌면 돌이 아닌, 인터넷 캐시 속 디지털 발자국으로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다. 2016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MBS)는 'SF 영화 시나리오'를 꼭 닮은 청사진을 펼친다. 이름하여 비전 2030(Vision 2030). 석유에 매달려 한 세기를 살아온 이 사막 왕국을 단숨에 기술의 미래로 끌어올리겠다는 선언이다. 약 1조 달러에 달하는 국부펀드(PIF)가 그 든든한 화수분으로 호명된다. 그 가운데서도 5천억 달러짜리 '네옴(NEOM)' 메가 프로젝트는 단연 백미다. 싱가포르 영토의 서른 배가 넘는 홍해 연안 2만 6,500㎢에, 인류 역사 최대의 인공 도시를 한꺼번에 빚어 올리겠다는 발상이다.

 

네옴의 심장 '더 라인(The Line)'은 사막을 170km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두 채의 거울 마천루로 기획된다. 무려 500m 높이, 런던 더 샤드의 1.5배가 넘는다. 산악 리조트 '트로예나(Trojena)'에는 인공 호수와 스키 슬로프를 갖춘 '아라비아판 생모리츠'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스무 채를 통째로 집어삼킬 만한 거대 정육면체 건물 '더 큐브(The Cube)' - 무려 500억 달러짜리 '도시 속의 도시' - 도 위풍당당하게 발표된다. 홍보 영상 속 풍경은 황홀했고, 세계 언론은 경외와 조롱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러나 2030년을 불과 4년 앞둔 지금, 그 화려한 청사진은 한 장 한 장 조용히 접히고 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더 라인' 공사는 2030년 이후로 사실상 무기한 연기된다. 인구 목표는 당초 150만에서 30만으로, 다시 10만 명으로 줄어든다. '트로예나'가 유치하려던 2029년 동계 아시아 올림픽은 카자흐스탄으로 넘어갔다. '더 큐브'는 끝내 휴지 조각처럼 폐기된다. 50억 달러를 쏟아부은 LIV 골프 투어 역시 재정과 명예 모두에서 처참한 실패작으로 재평가받는다. 2024년 4분기 80억 달러 규모의 자산 손상이 처리되었고, 2025년 2분기 건설 계약 발주액은 전년 대비 무려 72% 폭락한다. 사우디 국부펀드 총재 야시르 알 루마얀은 2025년 10월, "지출과 배분의 효율성 개선"을 새 5개년 전략의 골자로 못 박는다.

 

『사우디 주식회사(Saudi, Inc.)』의 저자 엘렌 R. 월드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거대하게 발표하고, 슬그머니 축소하고, 결국엔 사라지거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는 - 이건 MBS 이전부터 사우디가 되풀이해 온 오래된 각본이다." 2000년대 압둘라 국왕 시대에 추진된 '경제 도시' 프로그램에도 비슷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1천억 달러를 쏟아부은 킹 압둘라 경제 도시(KAEC)는 제다 북쪽 홍해 변에 들어섰으나, 비즈니스·관광 허브의 꿈은 끝내 모래 속에 묻혔다. 그 사이에도 청년 실업률은 12%대를 떠나지 못했다. 월드의 진단은 칼끝처럼 예리하다. "예스맨(yes-man) 문화가 모든 것을 망친다. 컨설턴트들은 큰 계약을 잃을지 두려워 왕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늘어놓는다."

 

경제의 좌초보다 더 짙은 그늘도 있다. 2017년 11월, 리야드 리츠칼튼 호텔에 사우디 고관과 기업가 수백 명이 일거에 감금된다. 정부는 '반부패 운동'이라 명명했지만, 한 인권 운동가는 그것을 '호화로운 갈취(extortion)'라 부른다. 약 1천억 달러가 그 객실 안에서 왕실 금고로 흘러 들어갔다. 미국에 거주하는 학자 압둘라 알-우다는 단언한다. "투자자들이 진실로 원하는 단 한 가지는 예측 가능성(predictability)이다. 어제는 투자자였다가 오늘 새벽 갑자기 구금될 수 있는 나라에, 누가 마음을 두겠는가." 2018년 10월 이스탄불 사우디 영사관에서 일어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은 왕세자의 명성에 지워지지 않는 잉크 자국을 남긴다. 같은 해, 알-우다의 부친이자 저명한 이슬람 학자 살만 알 우다는 '소요 선동' 등의 혐의로 수감되었고, 그 옥문은 지금도 닫혀 있다.

 

그럼에도 사우디는 멈추지 않는다. 다만 노선을 바꾼다. 사우디 사업가 타메르 셰이커의 표현을 빌리자면, "야망 주도(ambition-driven) 단계에서 실행 주도(execution-driven) 단계로의 자연스러운 진화"다. 옛 수도 '디리야(Diriyah)' 복원, 리야드 근교의 첨단 테마파크 '식스 플래그스 키디야 시티', 페트라에 버금가는 나바테아 유적 '알울라(AlUla)' 개발 사업은 그나마 현실의 토대 위에 서 있다는 평가다. 2034년 FIFA 월드컵 단독 개최권을 따낸 것 또한 손에 잡히는 외교적 성과로 꼽힌다. 한편, 네옴은 산업·AI 허브로 정체성을 갈아입는다. 2025년 5월 출범한 국가 AI 사업 '휴메인(HUMAIN)'은 엔비디아의 GB300 블랙웰 칩 1만 8천 개를 들여오고, 옥사곤(OXAGON) 항구는 호르무즈 해협을 대체할 새 무역 회랑(回廊)의 한 축으로 떠오른다. 분석가 압둘라 알-우다는 이를 "거창한 청사진 대신 작은 성공들에 집중하는 전략"이라 평한다. 신달라(Sindalah) 같은 홍해 작은 섬 리조트가 그 상징이다.

 

2026년 2월 말 발발한 미·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은 이 모든 재조정의 시계를 더 빠르게 돌린다. 걸프 정치·경제 전문가 마테 살라이는 "전쟁 전에는 네옴이 AI 허브로 재정립된다는 메시지가 주류였으나, 메시지가 매달 바뀐다"라며 "전략적 혼란의 징후"라고 짚는다. 사우디 재무부는 2026년 회계연도에 약 440억 달러의 적자를 예측하고, 12월 예산안에서 '네옴'의 이름은 끝내 빠졌다. 사우디 재무장관 무함마드 알 자단은 "경제적 의미가 없다면 비전 2030의 어떤 사업도 망설임 없이 연기·취소하겠다"라고 단언한다. 사우디 사회의 풍경도 분명 달라졌다. 여성 운전 허용, 엔터테인먼트 시장 개방, 리야드 거리의 활기. 그러나 정치적 반대 의견은 여전히 가혹하게 처벌되고, 스포츠워싱·아트워싱·그린워싱 논란은 가라앉지 않는다.

 

사막은 인간의 야망을 모래 위에 그려도 좋다고 너그럽게 허락한다. 그러나 그 그림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모래바람 한 자락에 흩어지고, 한낮의 태양 아래 색이 바래며, 끝내 또 다른 모래로 덮인다. 1조 달러의 화수분으로도 끝내 살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음을 우리는 새삼 깨닫는다. 그것은 한 인간 마음 깊은 곳의 평안이며, 한 사회의 신뢰이며, 한 국가의 정의(justice)이며, 무엇보다 자유로이 비판할 수 있는 시민의 입과 펜이다. 

작성 2026.05.26 22:59 수정 2026.05.26 22:59

RSS피드 기사제공처 : 중동 디스커버리 / 등록기자: 김종일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해당기사의 문의는 기사제공처에게 문의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