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수 조각가가 빚어낸 한국적 여체의 미학, ‘돌에서 피어난 대지의 어머니’

-50여 년간 ‘여성’과 ‘곡선’에 천착해 온 구상 조각의 거장

-거친 화강암에 따뜻한 생명력을 불어넣다

▲'생각하는 여인' 청석 60x40x57cm 2003 

◆차가운 돌에 온기를 불어넣는 마술사

단단하고 차가운 돌덩어리에 온기를 불어넣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인간의 살결을 만들어내는 조각가. 고정수 조각가를 수식하는 말은 다양하지만, 한국 미술사에서 그의 이름 석 자 앞에는 언제나 ‘여체 조각가’라는 독보적인 타이틀이 따라붙는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그는 오직 여성의 신체라는 하나의 명제에 천착해 왔다. 그러나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여체는 서구 미술이 추구해 온 팔등신의 매끄러운 비례나 관능적인 유혹과는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 그의 조각 속 여성들은 하나같이 동글동글하고, 풍만하며, 넉넉하다. 마치 우리 고향 어귀의 야트막한 능선을 닮았고, 기억 저편에 자리한 어머니의 포근한 품을 닮았다.


새롭고 자극적인 추상 조각과 개념 미술이 범람하는 현대 미술계의 흐름 속에서도 고정수 조각가는 묵묵히 흙을 만지고 돌을 깨는 ‘구상 조각’의 길을 고집하며 대중과 호흡해 왔다. 거친 돌 속에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생명의 원형을 길어 올린 그의 깊은 예술 세계를 대대적으로 조명한다.


◆서구적 미의 패러다임을 깨다...‘한국적 여인상’의 탄생과 철학

고정수 조각의 출발점이자 종착지는 ‘한국성의 발견’이다. 그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하며 서구식 조각 교육을 받았으나, 이에 안주하지 않고 "가장 한국적인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 결과물이 바로 그만의 독창적인 ‘여인상’이다.


그는 밀로의 비너스나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보여주는 완벽한 신체적 대칭, 날씬한 균형미 대신 한국 여인 특유의 체형과 정서에 주목했다.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어깨가 둥글고 엉덩이가 넓으며, 허벅지는 강인하고 튼실하다. 얼굴 역시 서구적인 이목구비의 화려함보다는, 이웃집 누이나 시골의 아낙네처럼 푸근하고 해학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러한 풍만함은 단순한 외형적 비만이 아니라, 만물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대지의 생명력’과 ‘풍요’를 시각화한 것이다. 미술평론계는 그의 여인상을 두고 "동양적 음양오행의 조화와 한국적 정서인 '정(情)'과 '낙천성'을 유쾌한 해학으로 승화시킨 걸작"이라고 평가한다. 누드 조각이 줄 수 있는 미묘한 거부감이나 관음증적 시선을 완벽히 지워버리고, 인간 존재의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건강함을 드러내는 것이 고정수 미술이 가진 독보적인 힘이다.


▲'우리 기다림 여기 이르렀으니' 청석 72x84x48cm 2003

◆육체적 한계를 넘는 숭고한 장인정신, 화강암에서 청동까지

고정수 조각가는 재료가 가진 고유의 물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탁월한 장인이다. 특히 한국의 산야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가장 단단하여 다루기 까다로운 화강암과 오석(烏石) 등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국내 최고 수준의 석조(石彫) 대가로 꼽힌다.


석조 조각은 작가에게 고도의 육체적 노동과 절대적인 인내를 요구한다. 육중한 돌덩어리 앞에 서서 정과 망치를 들고 수만 번, 수십만 번 돌을 내리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고독한 수행(修行)과 다름없다. 고정수 조각가는 이 고된 과정을 통해 돌이 가진 거친 겉껍질을 깨부수고, 마침내 아기 볼처럼 보드랍고 매끄러운 여체의 피부 질감을 찾아낸다. 돌의 자연스러운 결무늬와 색조는 억지로 가공되지 않은 채, 여인의 부드러운 옷자락이 되거나 신체의 아름다운 음영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그의 예술적 탐구는 시대의 변화와 표현의 확장을 위해 테라코타(점토를 구운 것), 브론즈(청동), 그리고 현대적인 재료인 FRP(섬유강화플라스틱)에 이르기까지 매체를 끊임없이 확장했다. 재료가 유연해지면서 그의 여인들은 더욱 역동적인 대화와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누워 있거나, 다리를 꼬고 웅크리고 있거나, 아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춤을 추는 등 자유로운 동세(動勢)를 통해 생명의 리듬감을 더욱 강렬하게 뿜어내게 된 것이다.


▲'사이좋게 지내자' 대리석 35x30.5x32cm 2014

◆‘곰(Bear)’ 연작으로의 대담한 확장, 해학과 대중성의 정점

고정수 예술 세계의 연대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변곡점 중 하나는 바로 ‘곰’ 캐릭터의 등장이다. 중견 조각가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후, 그는 여체 조각에서 보여주었던 특유의 볼륨감과 둥근 곡선의 미학을 동물의 형상으로 전이시키는 대담한 시도를 감행했다.


그의 손에서 탄생한 곰들은 무척이나 친근하고 정겨운 모습이다. 마치 사람처럼 의자에 걸터앉아 깊은 사색에 잠기거나,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능청스럽게 누워 게으름을 피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이는 단군신화 속 웅녀(熊女) 이야기를 연상시키듯, 사실상 그의 곰 연작은 여체 조각의 또 다른 변주이자 연장선상에 있다. 여성성 속에 내포된 포용력과 생명력, 그리고 특유의 넉넉한 덩치를 곰이라는 포근한 매개체를 통해 대중에게 더욱 위트 있고 친숙하게 전달한 것이다.


이 변화는 난해하고 무거운 현대 미술에 피로감을 느끼던 대중과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이자 따뜻한 위로였다. "예술은 일부 전문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길을 지나가는 대중도 보고 즐기며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도구여야 한다"는 그의 확고한 예술 철학이 대중적으로 완전히 만개한 순간이었다.


◆국전 대상에서 오늘날까지, 멈추지 않는 정과 망치 소리

고정수 작가는 일찍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한국 조각계의 신성으로 떠올랐고, 이후 수많은 개인전과 국제전을 통해 대한민국 구상 조각의 자존심을 지켜왔다. 그의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국내외 주요 미술관과 공공기관, 거리의 분수대와 공원 등에 설치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시민과 만나고 있다.


예술가로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영예를 안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실에서는 여전히 매일 아침 정과 망치 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진다. 흙을 이겨 포즈를 잡고, 무거운 돌을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깎아내는 일은 청년 조각가에게도 버거운 중노동이지만, 그는 “돌을 깎는 그 순간만큼 내가 살아있음을 강렬하게 느끼는 때는 없다”며 현역으로서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화목한 가족' 대리석 78x48x42cm 2003

◆시대를 관통하는 생명의 찬가, 우리가 거장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디지털 미디어 아트가 스크린을 채우고, AI와 첨단 기술이 예술의 영역을 빠르게 대체해 가는 2026년 현재, 온전히 작가의 육체적 노동과 감각에 의존하는 고정수의 아날로그적 작업은 더욱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


그의 조각은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묵직한 존재감으로 회색빛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소리 없이 질문을 던진다. 인간다움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바쁜 일상 속에서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은 어디에 있는가.


풍요롭고 넉넉하며, 모든 것을 품어 안아주는 고정수의 여인들과 친근한 곰들은 앞으로도 시대를 초월하여, 삶에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영원한 ‘대지의 품’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정 끝에서 피어날 또 다른 곡선의 미학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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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05.20 11:26 수정 2026.05.20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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