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신부 45,5x53cm Oil on canvas>
◆시끄러운 시대, 고요를 그리는 화가
[더인사이트뉴스 박주환 기자] 현대 미술의 흐름은 종종 자극적이고 파괴적이며, 때로는 해독하기 어려운 복잡한 담론 속에 갇혀 있곤 한다. 관람객들은 전시장 화이트 큐브 안에서 시각적 충격에 노출되지만, 정작 마음의 허기를 채우지 못한 채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유경희 작가의 작업은 역설적으로 ‘가장 기본적이고 서정적인 것’이 가진 힘을 증명해 보인다.
유 작가는 오랜 시간 ‘여인’이라는 일관된 모티프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탐구해 왔다. 그녀의 캔버스에는 거창한 정치적 구호나 난해한 철학적 상징 대신, 고개를 숙이거나 어딘가를 응시하는 한 여인이 자리한다. 그러나 그 단순해 보이는 구도 안에는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위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여인, 나를 투영하는 거울이자 보편적 휴식처
유경희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여인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 속 여인은 특정 인물의 초상화가 아니다. 작품 속 여인들은 주로 옆모습이나 뒷모습을 보이고 있거나,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이름도, 구체적인 서사도 생략된 채 오직 분위기와 몸짓으로만 말을 건넨다.
유 작가는 인물의 이목구비를 세밀하게 묘사하여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보다, 전체적인 실루엣과 분위기를 통해 ‘익명성’을 부여한다. 이 익명성은 관람객이 그림 속 여인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하게 만드는 강력한 기제가 된다. 감상자는 여인의 뒷모습에서 자신의 고독을 발견하고, 감은 눈에서 자신의 휴식을 찾아낸다.
◆시간의 층위가 빚어낸 오묘한 색채의 미학
유경희 작가의 작품이 가진 독보적인 아우라는 독특한 ‘마티에르(질감)’와 ‘색채’에서 기인한다. 그녀의 화면은 단번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덧칠과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낸 결과물이다.
유 작가는 캔버스 위에 색을 올리고, 다시 닦아내거나 덮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러한 중첩은 화면에 묘한 깊이감을 부여한다. 단순히 평면적인 색면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듯한 은은한 발색은 유경희 회화의 핵심이다. 이는 서양화의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동양화의 ‘번짐’이나 ‘스며듦’과 같은 깊은 정취를 느끼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녀의 팔레트는 자극적인 원색보다는 정화된 중간색, 즉 파스텔 톤이나 채도가 낮은 차분한 색조가 주를 이룬다. 낡은 벽화처럼 바스러질 듯 부드러운 질감과 따뜻한 색감은 관람객의 시각적 긴장을 해제시킨다. 유 작가는 색채를 통해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스며드는 빛처럼 관람객의 마음속에 서서히 젖어 드는 방식을 택한다.
◆고독의 긍정, 그리고 치유로서의 예술
현대인에게 고독은 극복해야 할 질병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유경희 작가의 작품에서 고독은 ‘부정적인 외로움’이 아니라 ‘긍정적인 고요’로 재해석된다.
작품 속 여인들은 멈춰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끊임없는 내면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유 작가는 이를 ‘정중동’의 미학으로 풀어낸다. 고요하게 앉아 있는 여인의 어깨선이나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은 그녀가 살아있는 존재임을, 그리고 자신의 내면과 치열하게 대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유경희 작가는 예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위로’와 ‘치유’에 있다고 믿는다. 거친 세상에서 상처받은 이들이 그녀의 그림 앞에 섰을 때, 그림 속 여인이 내어주는 빈자리에 앉아 쉴 수 있기를 바란다. 작가 스스로가 창작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듯, 완성된 작품은 다시 관람객에게 전달되어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우리 시대에 유경희 작가의 그림이 필요한 이유
유경희 작가의 ‘여인’ 시리즈는 단순히 아름다운 여성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소란스러운 외부의 소음을 잠재우고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시각적 명상’이다. 유 작가는 지난 수십 년간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서정적 화풍을 굳건히 지켜왔다. 이러한 일관성은 그의 작품에 진정성을 더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이라는 캔버스 위에 저마다의 고독을 그리고 살아간다. 유경희 작가의 여인은 그 고독이 결코 슬픈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귀한 시간임을 일깨워준다. 그녀의 작품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이 되어줄 것이며, 한국 미술계에서 서정 회화가 가진 고유한 가치를 증명하는 이정표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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