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산품의 생산지명이 상표

신라의 자석과 침은 나침반이 아닌가

나전칠기의 원료 생산지는 涉羅(섭라)

쇠뇌(弩<노>)와 무기 기술 유출 방지

 

신라가 자석과 침을 수출하였다고 한다. 등장하는 명사를 합하면 ‘신라침’, ‘신’을 빼면 ‘나침’, 그것의 틀에 동서남북 등의 자연의 법칙을 함께 넣어 자연을 바라보는 철학을 쓴 판을 붙이면, 나침판, 곧 나침반이 된다. 송나라의 발명품이 될 수 없는 것이겠다.

 

특산품의 생산지명이 상표

 

우리나라 골동품 가운데 도자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꽤 높으며

값도 매우 비싸게 형성되어 있다

특히 고리청자는 과학이 발달된 요즈음도 

그 은은한 푸른색 재현이 만만치 않아 희소성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요즈음은 순수한 재현은 달성하기도 하였으나

재현에 가치를 두기보다 옛 기법을 익힌 다음 

현대적 미감에 맞게 재창조하는 방향으로 흐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리시대 대량생산이 가능하였던 청자가 사라지고

조선으로 시대가 변했다는 이유만으로 

백자가 출현한 원인에 대한 의문에 

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려서 듣기로는 기술을 자식에게도 가르쳐주기 싫었기 때문에 

제조기술이 끊어졌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남에게 가르쳐 주기 싫은 기술 말할 때 고리청자냐?’가 표제어처럼 사용되었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고리의 영역과 조선의 영역이 달라

조선시대에는 청자를 만들 수 있던 점토 등의 재료를 

압두남(압록ㆍ두만강 이남)에서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하였는데

타자로부터 동의를 받아본 적은 없다

이렇듯 지역이 다르면 물산도 다를 것은 당연하고

이러한 특산물 때문에 국가간 교역도 발생함에도

이에 관심 두는 사람은 주위에 없어 함께 연구할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최초로 대륙지명 연구를 개척한 오재성선생은 

그런 품목을 몇십 년 전부터 잘도 파악해 두었었다

몇 가지만 인용해 보기로 한다.

 

 

1) 신라의 자석과 침은 나침반이 아닌가

 

唐僧法安來 傳天子命 求磁石.

〔문무왕 9년(669) 1월〕 당나라 승려 법안이 와서 천자의 명을 전하고 자석을 구하였다.

遣祇珍山級湌等入唐 獻磁石二箱.

〔9년(669) 5월〕 기진산 급찬 등을 보내 당나라로 들어가서 자석 두 상자를 바치게 하였다.

兼進貢銀三萬三千五百分·銅三萬三千分·針四百枚·牛黄百二十分·金百二十分·四十升布六匹·三十升布六十匹.

〔12년(672) 7월〕 아울러 은 33,500푼, 구리 33,000푼, 침 400개, 우황 120푼, 금 120푼, 40승포 6필, 30승포 60필을 바쳤다.

 

교과서에서 가르치기로는 宋()에서 나침반이 발명되었다지만

이와 같은 기록은 나침반이라는 용어는 

新羅針盤(신라침반)’에서 단순하게 이 빠진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결코 송의 발명품일 수 없다

더구나 하북성 남쪽에 磁()라는 지명이 있는바

원료가 되는 광물이 출토되므로 자석 생산이 가능하여 磁()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다.

나아가 그 지역이 신라의 영역이었겠구나 하는 귀납적 추론도 가능한 것이다

동이의 나라  상나라 안양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다.

 

 

2) 나전칠기의 원료 생산지는 涉羅(섭라)

 

특산물의 경우는 종종 그 원료의 산지 이름이 붙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모시는 한산모시’, 갓은 통영갓’, 화문석이라면 강화화문석이 유명한데

다른 생산지의 모시화문석이 품질생산량가격 등에서 앞서게 되더라도 

한산모시’, ‘통영갓’, ‘강화화문석의 명성을 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통영이 나전칠기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통영칠기라는 명성이 생기지는 않았다

나전칠기의 원산지가 아니기 때문이라 그럴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나전칠기의 유래가 어디였을까?

 

그 나전칠기는 珂()라는 조개껍질로 만들어진 특산물이다

그 珂()는 바다에서 생산되는 소라의 일종으로

그 껍질을 저미고 오려서 장식 만들 때 

사용하는 재료라고 여러 자전에 기록되어 있고

유명한 수공품인 나전칠기를 만드는 자개(소라껍질)를 의미한다.

 

螺鈿(나전)은 무엇인가

옛날 백과사전에는 蜔嵌(전감), 陷蚌吹螺螺填이라 하는데 

당 때부터 발전되고 명청 때 강서성의 노릉과 안휘성의 新安(신안)이 유명하였다.

-준생팔전과 격고요록에서 인용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신안과 노릉은 江淮(강회)지역에 있고

이 지역은 신구당서에서 신라가 있던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확인하지 못하였다

또 다른 자료에는 안휘성 동남 歙()이 나전칠기의 고장이라 했는데 

현재 지도에도 흡에는 신안강이 흐르고 있다.

신안이나 흡이라는 산지 외에 섭라라는 산지가 

하나 더 있음을 드러내는 기록이 있다

역시 삼국사에 있다.

 

十三年,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世宗引見其使芮悉弗於東堂. 悉弗進曰, “小國係誠天極, 累葉純誠, 地産土毛, 無愆王貢. 但黄金出自扶餘, 珂則渉羅所産, 扶餘爲勿吉所逐, 渉羅爲百濟所并. 二品所以不登王府, 實兩賊是爲.”

〔고구리 문자왕〕13년(504) 여름 4월에 사신을 보내 北魏(북위)에 가서 조공하니, 세종이 사신 예실불을 동당에 불러들여 만났다. 예실불이 나아가 아뢰기를, “소국은 정성껏 대국과 관계를 맺어 여러 대에 걸쳐 지극한 정성으로 (우리) 땅에서 나는 토산물을 조공하는데 허물이 없었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珂玉(가옥)은 涉羅(섭라)에서 생산되는데,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난 바가 되었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합되는 바가 되었습니다. 이 두 물품이 제왕의 府庫(부고)에 올라오지 못한 이유는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의 섭라를 歙()으로 의심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흡은 羅()와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더욱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이 빼어난 경치로 관광하러 가는 

黃山(황산)에서 동남쪽으로 멀지 않은 지역이며

지도에 許村(허촌)이 세 곳이 나타나는 지역이다

곧 가야였다가 신라로 편입된 지역으로 쉽게 짐작되어 

백제와 고구리의 영역으로 비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나전칠기의 원산지로 羅()가 들어가는 

지명이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리의 영역이었는데 백제에게 빼앗겼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에서 

아마도 하북성이나 하남성의 어느 지역으로 의심된다.

 

 

왼쪽에 각궁 견본에서 알파벳 'C'자로 보이는 것은 시위(실)를 묶지 않았을 때 모습이다. 그것을 뒤집어 당겨 시위를 묶어야 활모습이 되는데, 얼마나 탄성이 좋길래 뒤로 뒤집어도 부러지지 않을까? 그 주요 재료가 물소뿔이란다. 오른쪽의 사진은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쇠뇌의 견본을 찍어 AI 제미나이에서 변조한 그림이다. 신라의 한 기술자가 당 고종이 기술전수하라는 명령에도 버텻다고 한다.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3) 쇠뇌(弩<노>)와 무기 기술 유출 방어

 

쇠뇌는 여러 발의 화살을 거의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멀리 정확하게 발사할 수 있는 종류도 있어 고대 전쟁무기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신라가 성능 좋은 쇠뇌를 생산하여 

당 고종이 엄청나게 탐나서 제조기술을 빼앗고 싶었던 모양인데 

기술자가 목숨 걸고 유출을 막았다는 참으로 특이한 기록도 있다.

 

冬, 唐使到傳詔, 與弩師仇珍川沙湌迴. 命造木弩, 放箭三十歩. 帝問曰, “聞在爾國, 造弩射一千歩, 今纔三十歩, 何也.” 對曰, “材不良也. 若取材夲校勘 001國, 則可以作之.” 天子降使求之, 即遣福漢大奈麻獻木. 乃命攺造, 射至六十歩. 問其故, 荅曰, “臣亦不能知其所以然. 殆木過海, 爲濕氣所侵者歟.” 天子疑其故不爲, 刧之以重罪, 而終不盡呈其能.

〔9년(669)〕 겨울에 당나라 사신이 도착하여 조서를 전하고 쇠뇌 기술자[弩師] 구진천 사찬과 함께 돌아갔다. 〔당나라에서 구진천에게〕 나무 쇠뇌를 만들도록 명하였는데, 화살을 쏘자 30보 날아갔다. 황제가 물어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는 쇠뇌를 만들어 쏘면 1,000보가 날아간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구진천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재목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본국의 재목을 가져오면 그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천자가 사신을 보내 재목을 구하니, 곧 복한 대나마를 보내 나무를 바쳤다. 이에 다시 만들 것을 명하고, 쏘아보니 60보에 이르렀다.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 또한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나무가 海(해: 해를 꼭 바다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를 건너면서 습기에 젖었기 때문인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천자는 그가 일부러 만들지 않는다고 의심하여 무거운 벌로 위협하였지만, 끝내 그 재능을 다 바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활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는 기록은 곳곳에 남아있다

활을 만드는 재료에 물소의 뿔이 

탄성을 높이는 재료로 유용했다고 하는바

쇠뇌 또한 극도로 탄성을 높이기 위하여 필수적인 재료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압두남에서 물소가 자생했다는 

고고학 발견을 보았던 적이 없는 사실로 보아 

황해 서쪽 신라의 쇠뇌로 보인다.

 

 

4) 솜(棉<면>)을 신라가?

 

문익점이 붓대롱에 면화씨를 숨겨 들여오므로 

우리나라 의복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 거의 모든 사람들 뇌리에 진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 권문무왕 편에

 

遣沙湌須彌山封安勝爲髙勾麗王其冊曰, “~ 兼送粳米二千石·甲具馬一匹·綾五匹絹細布各十匹·綿十五稱王其領之.” 

〔10년(670) 7월〕 사찬 수미산을 보내어 안승을 고구리왕으로 책봉하였다. 그 책문은 다음과 같다. “~ 아울러 멥쌀[粳米(경미)] 2,000석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무늬 있는 비단 다섯 필, 명주와 곱게 짠 베 각 10필, 솜 15칭을 보내니 왕은 그것들을 받으라.”

 

이 솜을 보내는 신라를 압두남에만 존재하였던 신라라고 한정한다면

삼국사를 편찬한 김부식이 거짓말쟁이가 되거나

문익점의 이야기가 허풍스러운 이야기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주장하는 황해 내해론을 적용하면 아무런 무리없ㅇ이 이해된다.

 

황해 내해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사를 이해할 수 없음은 물론

우리 족속 자신의 정체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 강조하는 말로 서술하자면 

자신의 배나 가슴즉 몸통이 가려운데

내 몸이 가렵다고 다리나 팔만 긁으면 

가려움이 해소될까?

 

 

작성 2026.05.01 18:32 수정 2026.05.0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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