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장식해준 당신

Kenny Rogers

You decorated my life


어스름한 가을 저녁, 1979년의 Kenny Rogers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스며들던 그 순간, 내 삶은 정말로 ‘plain, pure and white’였다. 백지처럼 텅 빈, 아무도 그려주지 않은 종이. 아침에 눈을 뜨면 늘 같은 회색 도시가 창밖을 메웠고, 밤이 되면 피곤한 몸으로 소파에 누워 맥주 한 캔을 기울이는 게 전부였다.

 

꿈이라고 해봐야, 다음 달 월급으로 조금 더 좋은 고기를 사 먹는 정도.

Kenny Rogers가 노래한 대로, “All my life was a paper once plain, pure and white” 그 가사가 내 가슴을 정확히 찔렀다.

 

<이미지: AI image.antnews>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조용히 들어왔다.

처음엔 그저 사무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는 미소였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라는 한 마디. 그런데 그 한 마디가, 내 백지에 처음으로 부드러운 선을 그었다. 그녀는 화려하지 않았다. 특별한 재능도, 눈부신 미모도 없었다. 다만, 작은 것에 진심으로 웃고, 누군가의 실수에도 괜찮아요, 천천히 하면 돼요라고 말하는 따뜻한 온기가 있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내 마음에 은은한 색이 번졌다. 회색이 파란 하늘로, 차가운 콘크리트가 부드러운 노을로 물들기 시작했다.

함께 걷던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주고받던 짧은 문자 한 통.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창밖 좀 보세요.” 그 문장이 내 하루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라, 가슴이 저릿저릿 울리는 하모니를. 주말이면 함께 한강 둔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마다 내 안의 텅 빈 공간이 서서히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꿈이 더 이상 멀고 허황된 것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따뜻한 손길이 되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은 아직 IMF의 상처를 안고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모두가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를 외치던 시대. 그런데 그녀는 나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균형을 찾으라고 속삭였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인생은 마라톤이야. 너무 서두르다 보면 정작 중요한 걸 놓쳐.” 그 말이 가사처럼 스며들었다.

 

사랑은, 정말로 삶을 장식하는 마법이었다. 그녀와의 날들은 노란 햇살, 부드러운 바람, 은은한 장미 향기로 가득 찼다. 이전의 나는 성공이라는 단 하나의 색만을 고집하며, 나머지 모든 색을 지워버리고 살았다. 그런데 그녀는 내 캔버스에 조용히 여러 색을 덧칠해주었다. 기쁨의 빨강, 설렘의 주황, 포근함의 파랑. 가끔은 눈물이 글썽이는 연한 보라까지. 그녀를 만난 후, 내 얼굴은 분명 달라졌다. 더 부드럽고, 더 따뜻하고, 더 사람다워졌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걸었다. 헤어짐은 아팠지만, 그녀가 남긴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 2026년의 봄, 창가에 앉아 Kenny Rogers의 그 노래를 다시 듣는다.

 

우리는 너무 많은 색을 동시에 바르려 애쓰다가, 정작 진짜 색채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좋아요수와 팔로워 숫자로 삶을 장식하려는 우리.

 

그녀가 내 삶에 그려준 선들은 이제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따뜻하다. 가끔 피곤한 하루 끝에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보면, 그때의 그녀 미소가 스치듯 떠오른다. “You decorated my life.” 그 말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었다.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은은한 감사이자, 영원한 선물이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백지에 펜을 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작은 기쁨을 발견할 때마다, 가슴 속에서 허스키한 중년 남성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속으로 흐른다. 그녀 덕분에, 내 삶은 더 이상 백지가 아니다. 따뜻한 색감으로, 부드러운 선율로, 조용히 장식된 한 편의 그림이 되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다. 조금은 쓸쓸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아름다운 미소로.

 

 

-파이튼 팝에세이



작성 2026.04.19 08:10 수정 2026.04.19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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