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한 골목길 모퉁이의 한 방황자.
“I’m a creep, I’m a weirdo. What the hell am I doing here? I don’t belong here.” 이 반복되는 자조는 단순한 연애 실패담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한가? 왜 저기 빛나는 누군가의 자리에 설 수 없는가?
90년대 초중반, 이 곡이 울려 퍼지던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슬래커(slacker)’ 문화가 꽃피던 때였다. 니르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이 분노를 터뜨렸다면, 「Creep」은 그 분노조차 내면으로 삼켜버린 채 조용히 속삭이는 버전이었다.
경제적으로는 냉전 종식 후의 낙관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큰 소외감이 팽배했다. 대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안정된 일자리를 장담할 수 없었고, MTV를 통해 쏟아지는 완벽한 이미지들은 현실의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비슷했다. 90년대 중반 IMF 직전까지 경제 호황을 누렸지만, 그 이면에는 ‘88만 원 세대’의 전조처럼 불안정한 청년기가 있었다. 군대, 취업, 결혼이라는 레일 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상한 애’ 취급받던 시대. 그런 사회에서 「Creep」은 공식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해주었다. “나는 여기 속하지 않아”라는 고백은, 어쩌면 당시 많은 이들이 속으로 중얼거리던 말이었다.
특히 자기혐오의 표현 방식이 직설적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가사는 필터 없이 날것 그대로였다. “You’re so fucking special”이라는 외침은 동경과 동시에 증오가 뒤섞인, 거의 폭력적인 에너지였다. 90년대는 아직 SNS가 없던 시절이라, 이런 감정은 주로 음악이나 일기,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터져 나왔다. 자기혐오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게 아직 어색하고 위험한 일이었다는 증거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자기혐오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표현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인스타그램과 틱톡 시대에선 완벽한 셀카와 ‘나 오늘도 열심히 사는 중’이라는 캡션이 주류가 됐다. 그런데 그 뒤편에서 벌어지는 일은? 필터를 씌운 사진 아래 달린 댓글들, 익명 커뮤니티의 자조적인 유머, “나 진짜 루저ㅋㅋㅋ” 같은 자기혐오 밈. 90년대엔 「Creep」 한 곡으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면, 지금은 매일같이 수백 개의 짧은 자기비하 콘텐츠를 소비하며 ‘나도 그래’를 반복 확인한다.
소외감은 더 세분화되고, 더 일상화됐다. ‘Gen Z stare’처럼 무표정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조차, “나는 여기 속하지 않아”라는 오래된 외침의 변형처럼 느껴진다.
가장 큰 차이는 ‘공개성’과 ‘집단성’이다. 90년대엔 자기혐오가 개인의 고독한 독백이었다면, 오늘날엔 그것이 커뮤니티의 언어가 됐다. 혐오가 외부로 향하는 동시에 내부로도 향한다. ‘영포티’나 ‘MZ’ 같은 세대 조롱은 결국 자기혐오의 외주 버전일지도 모른다.
나는 부족하니까, 저 세대도 부족해야 공평하지 않느냐는 식의 심리. 「Creep」이 “나는 크립이야”라고 외쳤다면, 지금은 “너도 크립이지?”라고 서로에게 던지는 시대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reep」이 여전히 많은 사람의 플레이리스트에 남아 있는 이유는 아마 그 솔직함 때문일 거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완벽한 몸과 완벽한 영혼을 꿈꾸며 동시에 자신이 그렇지 못함을 아는 그 아픈 지점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과거엔 그걸 음악으로 토해냈다면, 지금은 스크롤하며 삼키고 또 삼킨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I don’t belong here”를 속으로 되뇌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이제 그 말을 혼자 하지 않게 됐을 뿐.
그러니 가끔은, “I’m a creep…” 하고 해보면 어떨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이상한 나 자신이 조금 덜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니까.
-파이튼 컬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