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절특집] 2000년 전의 한 사건이 어떻게 모든 이를 구원할 수 있나: 대속(代贖)의 신비, 그 우주적 사랑의 법정에 서다

무슬림이 절대 묻지 않던 충격적 질문: "이싸(예수)는 왜 십자가에서 죽었는가"

2000년 전 십자가 사건이 지금 당신을 구원하는 이유: 대속의 신비

이슬람과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 십자가: 무슬림이 꼭 알아야 할 대속의 법칙

▲ AI 이미지,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제공

대속(代贖)의 신비, 그 우주적 사랑의 법정에 서다

 

인류 역사에는 수많은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전쟁터에서 산화한 병사의 죽음, 억울하게 희생된 무고한 자의 죽음, 사랑하는 이를 살리려다 목숨을 내놓은 부모의 죽음. 그러나 역사 안에서 단 한 번, 한 사람의 죽음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모든 인류의 죄를 한꺼번에 담아냈다는 선언이 등장한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유대 땅,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 언덕 위에서 벌어진 그 처형이다. 이 사건은 오늘도 수십억 명에게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특히 이슬람 세계에서는 뜨거운 질문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알라께서는 전지전능하신데, 왜 굳이 한 사람을 십자가에서 죽게 내버려두셨는가?”, “죄 없는 이가 죄인 대신 죽는다는 것이 어떻게 공정한 법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무례한 도발이 아니다. 진지하게 진리를 찾는 영혼들이 품는, 지극히 타당하고 진솔한 물음이다. 이 거대한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오래전 중국의 한 산간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를 들여다보자.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한 노인에게는 애지중지하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그 동생이 다툼 끝에 사람을 죽이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마을의 법은 냉정하고 단호했다. 살인자에게는 예외 없이 교수형이 내려졌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었다. 사형수를 대신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자원자가 나타나면, 정작 죄를 지은 당사자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관습이었다. 노인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살 만큼 살았다. 하지만 내 동생은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이 많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동생 대신 교수대에 올라갔다. 

 

서글프고도 숭고한 이 이야기 속에는, 인류가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진리 하나가 담겨 있다. 완전한 사랑은 때로 대신하는 죽음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단순한 미담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우주와 인간 사이에도 정확히 이와 같은 영적 법칙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 모두가 동의하는 공통 명제가 하나 있다. 신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며, 인간의 죄는 반드시 심판받는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를 품은 인간은 본래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이 그 심판 아래 멸망하는 것을 차마 방치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잠정적 해결책으로 '제사'라는 길을 열어주셨다.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가 흠 없는 짐승을 대신 제물로 바칠 때, 그 피를 보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법이었다. 

 

흥미롭게도, 이슬람의 이드 알-아드하(희생절) 전통에서도 아브라함이 아들 대신 양을 제물로 바친 사건이 핵심으로 남아 있다. 제물이 사람 대신 죽는다는 원리, 그것이 대속의 씨앗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여기서도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다. 마음의 진정한 회개 없이 형식적으로 제물을 바치며 하나님을 속이려는 관행이 반복되었다. 짐승의 피로는 인간 영혼의 근원적 부패를 완전히 씻어낼 수 없었다. 임시방편의 치료가 근본 질환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결단을 내리신다. 외부에서 대리인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제삼자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입법자 스스로가 피고석에 앉는 것, 재판장이 직접 사형대 위에 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선언하는 성육신(成肉身)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무슬림 형제들이 십자가에서 가장 오해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슬람은 예수(이싸)를 위대한 선지자로 존경한다. 꾸란(Quran)은 그를 '알라의 말씀'이라 부르고, '알라의 영'이라 부른다. 그는 동정녀로부터 태어났으며, 기적을 행하고, 죽은 자를 살렸다고 꾸란은 증언한다. 그러나 꾸란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꾸란 4장 157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은 그를 죽이지도 않았고 십자가에 처형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가장 근본적인 분기점이다. 무슬림 형제들은 종종 이렇게 묻는다. “전능하신 알라께서 왜 자신이 사랑하는 선지자 예수(이싸)를 그토록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에 내버려두셨겠는가? 그것은 알라의 능력에 대한 모욕 아닌가?” 이 질문 안에는 진지한 신학적 직관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의 전제 자체를 되물어야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예수를 '포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당신의 자녀들을 '되찾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죄 없는 이가 죄인 대신 죽는다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무슬림들의 두 번째 질문은 더 날카롭다. 이슬람은 각자 자신의 죗값을 스스로 치러야 한다고 가르친다. 꾸란 6장 164절은 분명히 말한다. ‘어떤 영혼도 다른 영혼의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원칙의 위반이 아니라, 그 원칙의 완성이다. 핵심은 ‘누가’ 짊어지느냐에 있다. 무고한 제3자에게 강제로 죗값을 전가하는 것은 불의다. 그러나 죄인을 사랑하는 자가 자발적으로, 그것도 사랑의 본체인 하나님 자신이 그 죗값을 스스로 감당하기로 선택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죄의 삯은 반드시 치러졌다. 공의는 훼손되지 않았다. 단지 그 값을 치른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하나님 자신이었을 뿐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법적 구조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신학적 주장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예수 탄생보다 수백 년 앞서 기록된 성경 이사야서 53장이 증명한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썼다. 고난받는 종(Servant)이 올 것인데,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한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그리고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이 구절 안에 '우리'라는 단어가 일곱 번 등장한다. 그만큼 예수의 모든 고난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특정 민족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 전체를 향한 우주적 선언이다. 예수가 나타나기 수백 년 전에 이미 그 고난의 윤곽이 그려져 있었다는 사실은, 이것이 인간의 기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강하게 가리킨다. 이 세상에 어느 종교 창시자가 자신의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 심지어 자신을 적대하는 원수들을 위해서까지 죽음을 자원한 사례가 있었던가. 역사 안에서 오직 예수만이 그 길을 걸었다.

 

흥미롭게도 꾸란 자체가 예수(이싸)의 독보적인 위치를 증언한다. 꾸란은 무함마드를 알라의 말씀이라 부르지 않는다. 아브라함을 알라의 영이라 부르지 않는다. 모세에게 기적으로 태어남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꾸란에서도 예수에게만큼은 이 모든 칭호와 사건이 동시에 부여된다. 알라의 말씀, 알라의 영, 동정녀 탄생,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그렇다면 여기서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왜 유독 예수(이싸)에게만 이런 특별한 지위가 주어졌을까? 꾸란이 스스로 증언하는 예수(이싸)의 초월성은, 그를 단순히 선지자들의 줄 안에 놓는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다.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려 할 때, 이싸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슬람은 다섯 기둥(五柱) 위에 신앙의 집을 짓는다. 샤하다(신앙고백), 살라트(기도), 자카트(구제), 싸움(단식), 하지(순례). 이 의무들을 성실히 이행하면 알라의 심판 날에 선행의 저울이 악행을 이길 것이라는 기대가 그 안에 담겨 있다. 그 진지함과 헌신은 진심으로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솔직하게 물어보자. 하루 다섯 번의 기도를 마친 뒤에도, 라마단 한 달의 단식을 끝낸 뒤에도, 메카의 카바 신전 앞에 엎드린 그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는 그 공허함과 죄책감의 실체는 무엇인가. 나는 중동의 거리, 찻집, 한 식당 모퉁이에서, 수많은 무슬림 형제자매의 눈 안에서 해소되지 않는 갈망을 보았다. 그것은 그들이 신앙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인간의 어떤 행함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뚫린 구멍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바로 그 구멍의 크기에 정확히 맞게 설계된 하나님의 응답이다.

 

원래 십자가 위에 서 있어야 할 사람은 우리였다. 우리 안의 이기심, 분노, 음란함, 교만, 그리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어두운 것들이 심판받아야 마땅한 바로 그 자리에 예수가 대신 서셨다. 이것은 감정적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충족되는 우주의 법정에서 집행된 판결이다. 처벌이 면제된 것이 아니다. 처벌이 온전히 집행되었다. 단지 그 처벌의 수신자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건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역사는 예수가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했다고 정확하게 증언한다. 예수의 부활은 대속이 완성되었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었다. 죽음이 끝이 아님을 손수 증명한 것이었다. 20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그 사건의 효력은 단 하루도 유효기간이 줄어들지 않았다.

 

고난주간의 끝자락, 나는 다시 그 십자가 앞에 선다. 나는 그 사랑의 깊이를 아직도 다 헤아리지 못한다. 2000년이라는 두꺼운 시간의 층이 때로 그 사건을 먼 역사 속 한 장면처럼 희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고요한 새벽, 거울 속, 나 자신을 마주할 때,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못한 내 안의 가장 추한 것들과 홀로 대면할 때, 나는 그 교수대에 오른 그 옛날 중국 노인의 뒷모습을 다시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그 노인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훨씬 더 먼 곳으로부터 나를 향해 걸어오신 분의 발걸음 소리를 듣는다. 

▲ 사진: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제공
작성 2026.03.29 03:12 수정 2026.03.29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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