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사쓰마 번은 막대한 부채와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류큐 왕국의 조공 무역을 사실상 장악하고 이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류큐 본도에는 쌀 중심의 가혹한 수탈이 강화되었고, 아마미 군도는 사탕수수 생산 기지로 전락하여 ‘흑당 지옥’이라 불리는 비극적 상황이 발생했다.
동시에 사쓰마 번은 중국과의 무역을 유지하기 위해 류큐의 독립성을 위장하는 이화 정책을 시행하고 구메무라를 재건하는 등 체계적인 통제 전략을 구축했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형성된 복합적인 지배 체제의 결과였다.

1609년 류큐 침공 이후에도 사쓰마 번의 재정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1614년 이후 반복된 참근교대와 에도 번저 화재로 인해 지출이 급증하면서 재정 압박은 더욱 심화되었다. 겐나 연간에 이르러 사쓰마 번의 부채는 은 1,000관에 달하는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사쓰마 번이 독자적인 재정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며, 결국 외부 자원을 통한 수익 확보가 필수적인 과제가 되었다. 그 결과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의 조공 무역을 사실상 통제하며 그 이익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강화하였다.
사쓰마 번은 류큐 침공 직후 토지 조사인 검지를 실시하고 약 8만 9,000석 규모의 토지 가치를 산정하였다. 초기에는 류큐의 농업 현실을 고려하여 바쇼후(芭蕉布), 상포, 소가죽과 같은 특산품 형태의 상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충분한 재정 확보가 어려워지자, 사쓰마 번은 납부 방식을 은으로 전환한 뒤 최종적으로 쌀로 변경하였다. 18세기 초에는 매년 1만 1천 석에서 1만 2천 석에 이르는 대규모 쌀이 징수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세제 조정이 아니라 류큐 경제 구조 자체를 압박하는 결과를 낳았다.
식량 생산이 제한된 환경에서 쌀이 대량으로 수탈되면서 류큐 농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사쓰마 번의 수탈 정책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지역은 아마미 군도였다. 사쓰마 번은 류큐 영토였던 아마미 군도를 분리하여 직할지로 편입하였다.
이후 해당 지역을 사탕수수 생산 중심지로 재편하고 흑당 전매제를 시행하였다. 주민들은 생존을 위한 식량 농사조차 제한받은 채 사탕수수 재배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18세기에는 흑당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환당상납 제도가 시행되었으며, 이후에는 생산물까지 강제로 매입하는 총매입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자율적인 경제 활동은 완전히 제한되었다. 사쓰마 번에게 흑당은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는 핵심 자원이었지만, 주민들에게는 기근과 인구 감소를 초래한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훗날 ‘흑당 지옥’이라는 표현으로 기록되었다.
사쓰마 번은 류큐를 통해 중국과의 조공 무역을 유지해야 했다. 류큐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 무역이 중단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쓰마 번은 류큐를 일본과 구별되는 독립 국가처럼 보이도록 하는 이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일본식 복장과 이름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동시에 류큐 왕부는 대외 무역 실무를 담당할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구메무라를 재건하였다. 구메무라는 중국계 이주민 중심의 지역으로 외교와 무역을 담당하는 핵심 거점으로 성장하였다.
이 지역의 인구는 17세기 이후 급격히 증가하며 조공 무역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쓰마 번의 재정 위기는 류큐 왕국에 대한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수탈을 낳았다. 류큐 본도에서는 쌀 중심의 강제 징수가 이루어졌고, 아마미 군도에서는 흑당 생산을 강요하는 식민지적 착취가 전개되었다.
동시에 사쓰마 번은 무역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류큐의 독립성을 위장하는 정책과 행정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정치, 외교, 사회가 복합적으로 얽힌 지배 체제의 결과였다. 결국 류큐 왕국의 경제 구조는 사쓰마 번의 재정 회복을 위한 도구로 재편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은 극심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