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선은 늘 가까운 곳에 머문다. 산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꽃 한 송이, 계절이 바뀌는 들판의 색, 장터의 소란이 지나간 뒤의 조용한 길 같은 풍경이 시(詩)의 시작이 된다. 시인 송병서의 시에는 자연이 자주 등장한다. 변산 바람꽃이 먼저 봄을 알리고, 물살에 부딪힌 돌이 둥글게 다듬어지는 강가의 풍경이 나타난다. 자연의 변화는 삶의 흐름과 겹쳐지며 하나의 생각을 남긴다. 계절이 바뀌듯 사람의 시간도 그렇게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시집에는 가족과 함께 지나온 날들에 대한 기억도 담겨 있다. 주머니 속 만 원으로 호박떡을 사들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꽃구경을 나온 어머니가 꽃보다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같은 장면들이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 속에는 오래 쌓인 마음이 남아 있다. 이 시집엔 한 사람의 삶이 오롯이 그려져 있다. 생계를 위해 일하던 시간, 산을 오르며 마주했던 풍경,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며 떠오른 생각들이 시의 바탕을 이룬다. 꾸미지 않은 문장 속에서 삶의 경험이 그대로 전해진다.
“돌길에도 봄은 온다.”
거친 길 위에서도 계절은 바뀌고, 결국 봄이 찾아온다는 믿음이다. 이 시집은 삶을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지나온 시간을 이루었던 장면들을 차분히 펼쳐 보인다. 그 풍경 속에서 독자는 삶이 남긴 흔적과 조용히 마주하게 된다.
<작가소개>
시인 송병서
충청북도 보은에서 태어났다.
1981년 충남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다양한 삶의 현장을 지나며 세월을 살아왔다.
살아오는 동안 마음에 남은 풍경과
생각들을 틈틈이 글로 적어왔으며,
2024년 『아침의 문학』 제32호에서 「숭늉」으로
제15회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주식회사 광진전기공사 이사로 재직 중이며,
충북 영동군 심천에서 토종 다래와
산나물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삶의 풍경을 시로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목차>
제1부. 유월의 풍경
숭늉
선구자
오월 유산(遺産)
반영(反影)
너와 나
소나무
유월의 풍경
거시기
칠월 풍경
우리 사이
집사람
청벌레
친구의 문자
채송화—내음
점
탐구 생활
아쉬워요
놓을 수 없는
물음 꽃
봄까치꽃
제2부. 눈꽃 녹는 날
처마 아래서
눈꽃 녹는 날
미발송
빈 쟁반
춘화처리
낙화
오리숲길
낙엽
시선
꽃술 길
수선화
고속도로
승강기
변산 바람꽃
승강장
내일은
가을 길에서
감나무
공산성에서 듣다
굴뚝새
제3부. 돌길에도 봄은 온다
그 여름
나는 갈대에요
나비처럼
진주처럼
노송(老松)의 삶
눈길
눈사람
대북골 입동(立冬)
돌길에도 봄은 온다
도토리의 소망
썬텐
마지막 작품
맛
망각
명경(明鏡)
오월의 연기
무도장
민들레 기도
밀목재
밥 한 번 샀다
제4부. 진달래 필 때
봄을 향한 걸음
사연
서울 사람이 되는 방법
섬, 벚꽃
수취 거부
괜히
연마
오―날
자각
작은 연주회
주마등
진달래 필 때
철들다
가을밤 울음
파장
팥밭
풀 뽑기
해몽
행진
화톳불
장마
<본문 詩 ‘유월의 풍경’ 전문>
점심을 먹고 난 후
하릴없이 연거푸 하품만 품고
평상에 누워 있는데
바람은 내 옷을 자꾸 들치며
흘끔흘끔 배꼽을 훔쳐봅니다
노랑나비 한 마리
남새밭 위를 이리저리
떠돌며 구경하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딱히 할 일 없어
복분자 꽃밭에서 맴을 돕니다
나도
바람도
노랑나비도
그저 그 자리를 맴돌고
늦봄은 그렇게
여름으로 천금의 걸음을 걸어갑니다
<추천사>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지나온 시간의 결을 만나는 일과 닮아있다. 어떤 시집은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독자를 끌어당기고, 또 어떤 시집은 사유의 깊이로 독자를 붙잡는다. 송병서 시인의 시집은 그와는 조금 다른 자리에서 시작된다. 이 시집의 중심에는 오래 살아온 사람이 삶의 장면들을 돌아보며 남겨 둔 기록이 놓여 있다. 화려한 수사나 복잡한 장치보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먼저 드러난다.
이 시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과 일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다. 시인은 자연을 단순한 배경으로 두지 않고 자연 속에서 인간의 시간을 읽고, 그 시간을 다시 삶의 자리로 가져온다. 산길에서 마주한 꽃, 들판을 스치는 바람, 계절의 변화 같은 장면들이 시 속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그 장면들은 자연의 묘사에 머물지 않고, 살아온 삶의 흐름과 겹쳐지며 의미를 얻는다.
예를 들어 「선구자」에서 시인은 겨울이 채 물러가지 않은 산골짜기에서 피어나는 변산 바람꽃을 바라본다. 작은 꽃 하나가 계절의 시작을 알린다. 시인은 그 장면을 통해 자연의 질서와 생명의 시간을 보여준다.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계절의 문을 여는 모습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 시집이 독자에게 전하는 또 하나의 축은 일상의 가치에 대한 발견이다. 시인은 평범한 장면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숭늉」에서는 섣달그믐 밤, 방 안에서 숭늉 한 대접을 나누는 장면이 등장한다. 특별한 사건은 없다. 다만 뜨거운 숭늉을 마시며 나누는 짧은 농담과 웃음이 방 안의 공기를 바꾼다. 시인은 그 순간 속에서 사람 사이의 온기를 보여준다.
이 시집에서 특히 주목할 작품은 「돌길에도 봄은 온다」이다. 은퇴를 앞둔 시인은 돌길 위에 꽃씨 하나를 심는다. 돌길에도 봄은 온다는 문장은 삶의 시간을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를 잘 드러낸다. 인생의 길이 거칠고 단단할지라도 계절은 결국 바뀐다는 믿음이다. 시인은 그것을 거창한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작은 장면 하나로 삶의 방향을 보여준다.
또 다른 시들에서는 삶을 돌아보는 사유가 조용히 이어진다. 「점」에서는 선이 점들이 이어진 흔적이라는 생각에서 삶의 길을 떠올린다. 사람이 살아온 시간 역시 그런 점들이 이어진 자국이라는 깨달음이다. 「연마」에서는 물살에 부딪히며 모난 돌이 조약돌로 다듬어지는 과정을 통해 세월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바라본다. 이러한 시들은 자연의 이미지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시집의 후반부로 갈수록 시선은 조금 더 안쪽으로 향한다. 「자각」에서는 가족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지 못했던 시간을 돌아본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며 남겨진 마음이 담담하게 적혀 있다.
이 시집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삶의 의미는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지나온 날들의 작은 장면들 속에 이미 그 답이 놓여 있다는 것! 송병서의 시는 그 장면들을 조용히 꺼내 놓으며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송병서 지음 / 보민출판사 펴냄 / 112쪽 / 변형판형(135*210mm) / 값 12,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