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대 국가의 위치는 어디일까?

삼국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좌표

고구리는 도읍을 여러 번 옮겼다

천문은 제왕의 도읍에서 관측한다

장안성이라는 지명만이 아니라, 하북성 북부는 고구리 지명의 응집성이 높아 도읍이었던 그 장안성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 고대 국가의 위치는 어디일까?

 

우리 고대사를 알고자 김부식 삼국사를 읽으며 가장 답답한 점은 

삼국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사실에 있다

아마도 진지하게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의문을 갖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비슷한 생각을 갖겠지만

적어도 압록강 두만강의 남쪽(이후 압두남으로 표현하겠음)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제도권의 사학자들에 대한 불만도 만만치 않게 품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삼국의 도읍지를 딱 떨어지게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더욱 답답함을 보탠다

오늘 어렴풋하게나마 수도 위치를 찾아보기로 한다.

 

 

삼국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좌표

 

삼국의 도읍을 가리키는 대표적 기록과 증거를 뽑아보았다.

 

첫째로 꼽을 수 있는 확실하고 명쾌한 열쇠가 있으니

삼국사 권46 최치원전의 상대사시중장이 말해주는 내용이다

고구리와 백제가 강성할 때 강병 백만이 있어 

남으로 오와 월북으로 유연제로를 쳐서 차지하였다

(高麗{高句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오와 월나라 유연제로를 이 땅에 갖다 놓을 수 없다면 그 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둘째14 모본왕 2년 왕이 장수를 보내어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쳤다.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이 네 지명이 산서성과 하북성의 북쪽에 존재하니

그 가까운 어디엔가 고구리의 수도가 있어야 한다.

 

셋째25 개로왕이 고구리에서 보낸 중 도림의 꼬임에 넘어가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 궁궐과 누각과 전망대와 건물을 지었다. ~ 

하수(강이 아님)를 따라 둑을 쌓았는데 사성(蛇城)의 동쪽에서부터 

숭산(崇山)의 북쪽에 이르렀다.” (盡發國人 烝土築城 卽於其內 作宮樓閣臺榭. ~ 

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

이 땅에는 분황사 외에 벽돌건물 유적지가 없고, 숭산도 없다

숭산은 오악의 중심이라고 하여 중공의 엄청 유명한 산이다

다음 임금인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는데 

그 동쪽에 태산이 있어야 하고그 태산은 산동성에 존재한다.

 

넷째백제가 멸망하고 그 땅을 당이 지배하고 싶어 

다섯 곳에 도독부를 두는데 그 가운데 동명과 덕안이 

산동성 서남쪽과 강서성 북쪽에 오늘날도 존재한다

백제 땅을 당은 한뼘도 갖지 못하고 발해와 신라가 나누어 가졌다는데

이 땅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기록이다

또 고구리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고 하였는데 

얼마 못되어 밀려나서 현재 북경 남쪽의 신성으로 안동도호부를 옮긴다

압두남(압록강과 두만강의 남쪽)에는 

도독부든 도호부든 존재했던 지명이 안동 외에는 없고 

안동에 도호부가 존재했었다는 흔적도 없다.

 

다섯째덕흥리 고분은 묵서로써 매우 분명하게 

묘주가 유주자사 진이라고 써있어 부정할 수 없다

그 유주에서 일생을 보냈던 사람이지만 

압두남도 내 땅이니 무덤을 쓸 수 있었고

백제 무녕왕도 공주에 영역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 

왕릉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진의 무덤양식이 아니라 

대륙백제의 무덤양식으로 지어진 무덤이 되는 것이다

 

대륙과 압두남의 기록을 따로따로 분리할 수 없어도 

유적과 유물은 환황해공동체를 증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고구리는 도읍을 여러 번 옮겼다

 

주몽은 서기전 37년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단지 비류수변에 집을 짓고 

고구리라 하고 高()로써 씨를 삼았다고 삼국사가 전하였다

 

유리왕 3에 왕비를 잃고 두 여자를 취하였는데 

칠일동안 箕山(기산)으로 사냥갔다 오니 서로 다투었다는 

기록에 등장한다기산은 遼()와 매우 가깝다

()는 1942년 좌권으로 지명을 바꾸었지만

역사적으로 줄곧 遼(때에 따라 요주요동)라는 지명을 유지하며 

우리 역사와 끈질긴 인연을 갖는다

 

한편기산이라는 지명을 듣는 순간 

누구나 箕子(기자)’를 떠올릴 터인데 

그 상나라 마지막 임금 紂()의 숙부라는 

그 기자와 인연이 깊은 지역으로 

상나라 수도였던 안양의 서북 120킬로 지점에 있다.

 

유리왕 21년 제사에 쓸 돼지를 쫓아갔다 

國內 尉那巖(국내 위나암)이 도읍할 곳임을 알게 된다

22(서기 3) 10월 왕이 국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천도하고 質山(질산)으로 사냥갔고

2년 뒤에 또 箕山原野로 전렵을 갔다고 하였다

이 사실에서 국내 위나암도 기산과 무척 먼 곳이 아닌 

산서성과 태행산맥 어디 쯤임을 추정할 수 있다.

 

산상왕은 고국천왕의 아우인데 兄死取嫂(형사취수)하고 

왕위를 물려받아 바로 위의 형인 發岐(발기)가 반발하는데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군사 3만을 빌려 산상왕을 제압하려 하니 

산상왕은 동생 罽須(계수)를 시켜 진압한다

이 사건으로 보아 역시 첫 번째 도읍 졸본과 가까웠고

()와 멀지 않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2년에 환도성을 쌓았고13(209) 10월 도읍을 환도로 옮겼다.

 

동천왕은 위촉오 삼국을 통일한 조조의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략을 

첫 전투에서는 깼으나 역습에 쫓겨 옥저 땅까지 도망친다

위장 관구검은 숙신의 남쪽 경계와 환도산에 전공을 각석하여 남기고 회군한다

동천왕 21(247) 환도성이 도읍을 할 수 없도록 망가져 

왕검의 택지였던 평양성을 쌓고 종묘사직을 옮긴다(천도한다). 

 

이 왕검이라는 기록에서평양은 단군의 도읍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게 만든다

그런데 연나라 사람 衛滿(위만)이 조선()의 기준을 쫓아내고 

도읍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는데 옛 단군임검<왕검>의 옛 도읍이었다고 했고

현 북경 서남쪽에 滿(만성)이 있어서 이 역시 우연일 수 있을까 의심된다

만성은 북경과 서남쪽 하북성 대도시인 석가장 사이에 있다

[괄지지에는 불내성(관구검이 환도산에 새겼던 석각)은 곧 국내성이며 

환도산과 국내성이 상접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위치가 명확하게 추정되는 곳은 없다.

 

고국원왕 4년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12(342) 2월 환도성을 보수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8환도성에 이거하였다

10월 연왕 모용황이 침략하여 미천왕릉을 도굴해 가는 등의 온갖 치욕을 당한다

13년 7월 평양의 東黃城(동황성)에 이거하니 

지금(고리 김부식이 삼국사 편찬 시西京(서경동쪽 목멱산 속에 있다

동황성이 오늘날 하북성의 매우 큰 도시 석가장 동쪽이고 안평의 서쪽 변에 

1940년대 지도에서도 볼 수 있었고

오늘날도 구글지도를 매우 확대하면 

동황성진동북황성촌 등이 표시되어 있으나

완전히 평야지대라 과연 그 동황성이 맞을까 

믿어지지는 않지만주위의 지명 등과는 정합성이 꽤 높아 보인다.

 

장수왕 15(427)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아무런 추가 기록이 없어 동천왕이 천도하였던 

그 평양성과 같은 평양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557~581년 사이에 존재하였던 북주가 평양이라 하였는데 

위치에 대한 정보는 역시 없다.

 

평원왕 28년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장안성은 북경육군측량국편집 중화민국 7(1918

“50만분의중국여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현재 북경 남쪽에 접한 고안현 서북쪽이다

1968년 11월 기준하여 미국 육군 지도국에서 발행한 지도에도 

Chang-an-Cheng이라고 보인다

다만 평원왕 때 장안성인지 확인할 근거는 없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장안성 인근 20㎞ 남짓한 거리에 

당이 두 번째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던 신성이 위치하며

그 주변에 유리하가 흐르고

국내성·환도성 등 고구려 도읍 관련 지명의 후보지가 

집중 분포한다는 사실이다

앞서 검토한 졸본·위나암·환도·평양 등 여러 수도 후보지 역시 

이 권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지명군(地名群)의 공간적 응집성은

장안성이 고구려 후기 수도였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한다."

 

보장왕 27(668) 9월 평양에서 패망하는 기록을 볼 수 있지만 

장안성에서 언제 천도하였는지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금강의 한 부분을 백마강이라고 할 뿐이다. 대륙 산동성에는 그 백마하인지 몰라도 옛 지도, 현 지도에 나타난다. 안휘성 합비라는 지역에 함산이 하나도 아닌 둘이나 있고, 팔공산도 있으며, 주위에 신라 지명이 너무도 많이 산재하고 있다.

 

백제는 도읍을 네 번 옮긴 기록

주몽이 부여를 떠나기 전에 낳은 아들이 장성하여 찾아오자

불안한 온조는 형인 비류와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고 결심하며 남쪽으로 떠난다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곳을 바라보며

하남의 땅은북이 한수를 두르고동은 고악을 의지하였으며

남은 옥택을 바라보고서쪽은 대해를 격하여천험지리가 뛰어나다는 

신하 열 명의 조언을 받아들여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다

서기전 18의 일이다

 

해변에 살고 싶던 비류는 미추홀로 떠나갔고뒤에 실패를 자인한다

 

온조왕 13년 5월 우리나라 동에는 낙랑이 있고북에는 말갈이 있어 (중략

한수의 남쪽을 돌아보았는데 

땅이 기름져서 마땅히 도읍을 정하고 오래 편안할 계책을 꾀할 것이다.”고 하며 

7월 한산 아래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겼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천도할 것을 알리고 강역을 정하는데

북은 浿河(패하)에 이르고남은 웅천으로 경계를 짓고

서는 대해에 이르며동은 走壤(주양)에 다다랐다

14년 정월에 천도하였다.

 

문주왕은 475아버지 개로왕이 간접자본 구축에 지나치게 몰두하느라 

국방에 소홀하여 고구리의 기습에 목숨까지 잃게 되니

황망 중에 도읍을 熊津(웅진)으로 옮겼다

 

그 웅진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록은 

二年七月 仁願仁軌等 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 

拔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 殺獲甚衆

(662년 7월 유인원과 유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대를 대파하고 

지라성 및 윤성대산사정 등의 방어설비를 빼앗고 죽이고 잡은 군사가 많았다)이 있다

 

특히 大山은 岱山泰山太山과 섞어 사용되었으므로 

태산으로 무난하게 추정할 수 있다면

오늘날 지명인 태산의 동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웅진의 津()이란 나루를 뜻하므로 

도읍 자체의 지명이라기보다 

도성으로 들어가는 수운 관문을 가리켰을 가능성이 크다

시대적으로 가까운 남북조시대의 남조 세 번째 나라 

(, 502~557, 55년 존속)나라의 양서 백제전에 

다스리는 곳의 城()을 固麻(고마)라 하고

읍을 말하여 담로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고

고마()는 일본 고어에서도 熊을 뜻하므로

도읍의 본명은 '고마성(熊城 또는 羆城)'이었고

그 나루터가 웅진으로 불렸을 것이다

 

나아가 이 고마는 으로 인지하며

곰은 契()로 熊(자도 있지만(자도 있다

따라서 글로 표기하면 熊城(웅성)만이 아니라 羆城(비성)도 가능하므로 

고마성을 찾는 추정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을 듯하다

다음 기회에 상론하겠으나

지난 3월 3일 창해지군과 강회 사건의 왜곡 수법에서 검토한 바와 같은

 화하족의 지명 개서(改書관행을 고려할 때

태산 서쪽에 현존하는 肥城을 웅진(고마성)의 후보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聖王(성왕)은 16년 봄 泗沘(사비)로 도읍을 옮기고국호를 남부여로 하였다

오늘날 지도에서 泗沘라는 지명은 전혀 찾을 수 없으나 

산동성 남부에 泗河(사하)라는 물줄기가 곡부를 관통하고 있고 

泗水(사수)라는 지명도 현존한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사하보다 작지만

나란히 흐르는 白馬河(백마하)가 1918년 지도에도

오늘날 지도에도 여전히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신라의 도읍지는 움직이지 않은 듯

 

시조의 성은 씨이고 이름은 혁거세. ~ 

이 때 나이는 13세이고 국호는 徐那伐(서나벌)이라 하였다

(도읍의 기록은 없더니) 21(BCE37) 경성을 쌓고 이름을 금성이라 하였다

26년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남해차차웅 원년에 낙랑 군사가 몇 겹으로 금성을 둘렀다고 하였으니

낙랑군과 가까웠고 참으로 작았던 도읍으로 이해되게 한다.

 

파사이사금 22(101) 2월 성을 쌓고 월성이라 이름지었다

7월 왕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다

그런데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아 살았는데 

그곳이 월성이 되었다고 탈해를 소개하는 글에 기록하였다

 

34 지리지1에는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고 

이름을 월성이라 하고 혹 재성이라 하였는데 둘레가 1,023보였다

신월성 북쪽에 만월성 있고 둘레가 1,838

신월성 동쪽 명활성이 있고 둘레가 1,906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이 있고 둘레가 2,804보이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였으니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거처하였다고 전한다.

 

자비마립간 18(475) 명활성(明活城)으로 옮겨 살았다.

 

소지마립간 9 7월에 보수하고 

10(488) 정월 월성에 옮겨 살았다.

신문왕 9년 왕이 서울을 달구벌로 옮기려 하였으나 실현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신라는 삼국사 기록으로 보면 

금성에서 월성으로 옮긴 뒤 십여 년 동안 명활성에 옮겨 살았던 일 밖에는 

월성을 계속 도읍으로 유지하였다

토함산이 신라본기에 세 번 등장하여 수도와 가까운 곳임을 기록하였다.

 

박창범교수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56쪽에서 전사하였음

 

천문은 제왕의 도읍에서 관측한다

 

삼국사는 압두남에 사는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기후 관련 등의 기록으로 

우리가 배웠던 역사와 달리 환황해문명이었음을 강하게 전하고 있다

더욱이 어느 사서보다 삼국사에 많이 등장하는 

일식기록은 삼국의 도읍 위치를 밝히는 자료이므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 짧게 언급하기로 한다

 

일식 등의 천문관측은 국가를 통치하는 자의 권한이고 책임이므로 도읍에서

그것도 지배자인 왕과 가까운 위치에서 관측하는 것이 상례이므로 

도읍의 위치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연구 발표 당시 서울대 천문학과에 재직하던 박창범교수는

그 이전에 많은 연구자들은 일식의 실현 여부에만 관심을 가졌으나

그들과 달리 몇백 년간에 누적된 일식의 기록이 겹쳐질 수 있는 관찰위치를 역추적하면

그 위치가 도읍일 것이라는 상식적이지만 독특한 발상으로 연구하였다

놀랍게도 그 위치는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 주장하던 

압두남을 포함한 만주 땅이 아니었고 

앞의 지도에 표시된 지역이었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제시한 사서 기록과

박창범교수의 일식 관측지와의 정합성을 

직접 확인하시기 바란다.

 

우리 역사가 결코 압두남(압록과 두만강의 남쪽)만의 것일 수 없음이 실감나실 것이다.

 

 

작성 2026.03.24 02:13 수정 2026.03.24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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