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사, 대륙에서 벌어진 역사를 읽는 열쇠
삼국사 없는 한국사는 존재할 수 있는가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는 비난은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 비난이 성립하면 삼국사 전체의 신뢰가 무너지고,
고리(고려) 이전 천 년의 역사가 공백이 되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다.
혹자는 삼국유사가 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삼국유사를 설화집으로 분류하는 국문학자가 있을 만큼
사서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삼국사를 부정하기에 앞서,
삼국사 없는 한국사가 과연 가능한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우리 역사를 오천 년이라 할 때,
단군시대에 해당하는 고대에는 전해지는 사서가 없다.
이천 년 전부터 천 년 전까지 허리에 해당하는 시대를 기록한 것이 삼국사인데,
이마저 없으면 고리사(고려사) 한 권만 남는다.
'조선왕조실록'이 있다고 하겠지만, 실록은 실록일 뿐
사서로 다시 편찬된 적이 없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통사는 대한제국의 역사를
망국의 한 속에서 타국에서 집필한 책이다.
이처럼 삼국사는 대체 불가능한 사서다.
제호의 문제: '삼국사'인가, '삼국사기'인가
고리사 세가 인종 23년 조에 의하면,
김부식이 편찬된 책을 왕에게 올리며
스스로 '삼국사'라 하였다. 이것이 원래 제호다.
'삼국사기'라는 명칭은 사마천의 사서명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1909년 일본 학자 석미춘잉(釋尾春芿)이 삼국사기라는
단행본을 출판하면서 사용한 제호가 굳어진 것이다.
국권상실기에 정착된 명칭이므로 바로잡아야 할 언어정화의 대상이라 판단한다.
편찬 체제: 김부식 혼자의 책이 아니다
삼국사는 개인 저술이 아니라 관찬(官撰) 정사(正史)다.
삼국사 자체에서 밝히듯,
편찬에 참여한 인물은 김부식 외에 10명이었다.
행정 관련 관구 2명을 제외하더라도,
사료의 취사와 서술·평가를 맡은 참고 8명의 보조 집필자가 있었다.
국가적 사업인 만큼 개인의 성향이 스며들 여지는 그만큼 적다.
이 사실은 삼국사 내부에서도 확인된다.
권43 김유신 열전 하 말미에는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민멸하여 전문할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음에도,
권44에 을지문덕전과 장보고전이 엄연히 실려 있다.
서로 상충되는 기록이 공존하는 것 자체가,
단일한 사대주의적 관점으로 통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삼국사의 위대함: 구체적 근거
삼국사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다.
첫째, 찬자와 편찬 시기가 명시된 거의 유일한 사서다.
많은 사서가 찬자나 편찬일이 불분명하여 신뢰성에 의심을 받는 것과 대조된다.
둘째, 담고 있는 시간의 규모가 압도적이다.
신라 992년, 고구리 695년, 백제 678년을 망라한다.
셋째, 천문 기록의 신뢰성이 높다.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삼국사에 기록된 66개 일식 기록의 실현률이 80%이며,
서기 200년 이전의 초기 기록은 실현률이 89%에 이른다.
이는 삼국사 초기 기록 불신론이
실증적으로 근거가 없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넷째, 삼국을 비교적 공평하게 기록하였다.
흔히 신라 중심이라 하지만,
신라와 다른 두 나라의 전쟁 기록에서는 신라가 '우리'이나,
당과의 전쟁이라면 삼국 모두를 '우리'라 표현하였다.
본기의 분량 또한 존속 기간에 비례하여 신라 12권, 고구리 10권, 백제 6권으로 배분하였다.
다섯째, 사실적 기술이다.
자국의 패배나 치욕적 사건도 감추지 않고 기록하였다.
눈에 거슬리는 기록들: 있는 그대로 보되, 맥락을 읽어야 한다
삼국사에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이 있음은 사실이다.
'조공하였다'는 기사가 지나치게 많고,
삼국의 왕이 서토(西土)의 신생국 지도자에게 보낸
외교 문서를 '표를 올렸다'고 표현하였으며,
고구리·백제 본기의 꼬리말에
당나라에 거역하여 멸망을 초래하였다는
사신(史臣)의 논(論)은 분노를 유발하기도 한다.
왕의 계보에서도 논리적 모순이 보인다.
예컨대 대무신왕은 유리왕의 셋째 아들 무휼로,
다물후 송양의 딸 소생이라 하였고,
유리왕 즉위 33년에 11세로 태자가 되었다고 하였다.
역산하면 유리왕 23년생이다.
그런데 유리명왕 3년에 왕비 송씨가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유리명왕 3년에 돌아간 왕비가 23년에 아들을 낳을 수는 없다.
이러한 모순은 원사료의 착오이거나 편찬 과정의 불일치일 수 있으며,
편찬자의 의도적 왜곡이라기보다는
여러 계통의 사료를 합산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삼국사 전체의 가치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불편한 기록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편찬자들이 원사료를 함부로 고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핵심 질문: 삼국사의 사건은 어디에서 벌어졌는가
여기서 이 글의 핵심으로 들어간다.
삼국사에 기록된 사건들은 과연 어디에서 벌어진 것인가?
권46 최치원전은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고구리와 백제가 강성할 때 강병 백만이 있어
"남으로 오(吳)와 월(越), 북으로 유(幽)·연(燕)·제(齊)·로(魯)를
쳐서 점령하였다('점령하였다'는 필자의 추정번역이다)"고 하였다.
오·월·유·연·제·로는 누구나 알듯이 지나 대륙의 지명이다.
이 지명들이 소위 '반도' 안에 있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아가 이 글을 쓰는 최치원 자신이 그 여섯 지방의 중간 위치,
즉 안휘성이나 강소성 인근 어디엔가 생존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18사(十八史) 동이전과 대조하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남제서 동이전에는 백제 동성왕이 대륙 곳곳에서 승리한 장군을
해당 지역의 태수나 왕으로 임명하였음을 통지하는 국서가 실려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광양(廣陽, 북경 지역), 성양(城陽, 산동성),
청하(清河, 하북성 동남), 광릉(廣陵, 남경 인근)만으로도,
백제가 지나 대륙에서 활동하였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후한서와 삼국지 동이전에서 알려주는
동이 국가의 위치를 지도와 맞추어 보면,
황해에 접한 하북성부터 광동성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 모두
삼국의 활동 무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요동성이 요주가 되었고, 요는 늘 그 위치에 존재'한다는
이전에 올렸던 글과 함께 보면,
삼국의 영역은 일본인이 악의적으로 조어한
'한반도'라는 좁은 틀에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삼국사와 18사 동이전을 함께 교차검증하여야
삼국사를 사대주의의 산물이라 비판하는 데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과제가 있다.
삼국사에 기록된 지명, 전투, 외교 기사 하나하나를
18사 동이전의 기록과 교차 검증하는 작업이다.
삼국사 안에서 도저히 '반도' 안의 사건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록이 수없이 많다.
이를 대륙의 지리와 대조하면
비로소 논리적으로 정합성을 갖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삼국사 초기 기록 불신론은 역사가 깊은 나라를,
사서 자체조차 온전하지 못한 나라인 일본이 다스리려 할 때
백성의 저항 의지를 꺾으려던 방편이었다.
광복 후 거의 백 년이 흘러가는 오늘날까지 이를 극복하지 못한 현실은 안타깝다.
삼국사는 과거를 기억하게 만드는 수많은 사서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칠백 년 내지 천 년의 존속기간을 가진 위대한 나라들의 기록이다.
이 나라들의 영역이 압록강과 두만강 남쪽
20만 평방킬로미터에 불과한 땅을 두고 다투었다고 보는 것은,
삼국사 자체의 기록과 모순된다.
삼국사와 18사 동이전을 함께 펼쳐놓고, 지명을 대조하고,
사건의 지리적 정합성을 따져가며 교차 검증하는 것.
이것이 삼국사를 읽는 올바른 자세이며, 삼국의 실체에 다가가는 첫걸음이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