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클레어 키건의 원작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옮긴이의 글을 읽고 나서야 이 문장이 뜻하는 바를 알게 되어 섬뜩했다. 수녀원에서 학대당하던 벌거벗은 소녀는 결국 강으로 도망쳐 몸을 던졌고, 물에 불은 시신이 되어 떠올랐다. 빌 펄롱에게 강에만 데려다 달라고 애원하던 소녀의 말은 탈출의 부탁이 아니라 죽음을 향한 요청이었다.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종교 시설이 어떻게 이처럼 끔찍한 지옥이 되었을까. 키건의 시적인 문장은 그 질문을 직접적으로 던지지 않는다. 대신 눈 덮인 거리와 어두운 강, 겨울 공기 같은 풍경을 통해 서서히 독자를 그 세계로 데려간다. 그리고 그 세계를 스크린으로 옮긴 사람이 바로 팀 밀란츠다.
맷 데이먼과 주연을 맡은 킬리언 머피가 제작에 참여하고 멧 데이먼의 오랜 친구이자 파트너 벤 애플렉이 기획에 참여한 이 영화는 원작의 서사를 더 압축하면서도, 그 침묵의 감정을 영상으로 확장한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한 남자의 얼굴이 있다. 바로 킬리언 머피가 연기한 빌 펄롱이다. 가만히 있어도 슬퍼 보이는 눈, 어딘지 쓸쓸한 걸음걸이,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 머피의 연기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원작보다 더 적은 대사를 사용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마치 그의 얼굴 자체가 과거를 각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는 빌의 어린 시절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와 네드, 그리고 윌슨 부인의 관계 역시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원작에서는 이 관계가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윌슨 부인은 개신교도였고,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의 작은 항구 마을에서 외톨이처럼 살아가던 인물이었다. 남편은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고, 전쟁 연금과 목장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편이었다. 빌의 어머니와 네드는 그녀의 집안일을 돕던 사람들이었다. 미혼 상태로 아이를 낳은 빌의 어머니는 마을에서 쉽게 손가락질 받을 수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윌슨 부인은 그녀를 내쫓지 않았고, 아이를 낳도록 도왔다. 그리고 그녀가 죽자 어린 빌을 자신의 집에서 자식처럼 키웠다. 만약 윌슨 부인이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빌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막달레나 수녀원으로 보내졌을지도 모르고, 빌은 어딘가 다른 집 양자로 팔려갔을지도 모른다. 결국 빌의 삶은 한 사람의 작은 선의 위에 놓여 있었다.
어른이 된 그는 석탄 상인이 되었고, 다섯 딸을 키우는 가장이 되었다. 사랑하는 아내도 있고 안정적인 삶도 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를 앞둔 그의 얼굴은 어딘지 밝지 않다. 수녀원의 석탄 창고에서 한 소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추위와 어두움 속에 내팽개쳐진 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소녀를 다시 수녀원 안으로 데려다 주지만, 무서운 수녀원장 앞에서 왜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를 사실대로 말하진 못한다.
이제 빌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수녀원은 그의 딸들이 다니는 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마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괜히 문제를 일으켰다가 공동체에서 배척당할 수도 있다. 눈을 돌리고 모르는 척하면 모든 것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의 아내 역시 현실적인 말을 한다. 우리 딸들만 잘 키우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리고 그곳에 있는 여자아이들은 문제를 일으킨 애들이 아니냐고.
이 논리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논리다. 막달레나 수녀원에 끌려간 여성들은 미혼모, 매춘부, 가출 소녀들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단지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라는 이유만으로 보내진 경우도 많았다.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남자들과 눈이 맞을까 봐, 집안의 명예를 더럽힐까 봐 보내진 소녀들도 있었다. 그곳에서 여성들은 세탁 노동을 강요받았고, 매질을 당했으며, 아이를 낳으면 빼앗겼다.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히면 머리를 깎이고 감금되었다. 그 시설에 들어오는 세탁물은 호텔과 군대, 식당에서 보내진 것들이었다. 그렇게 약 70년 동안 3만 명에 가까운 여성들이 강제 노동을 했다. 그리고 이곳으로 그들을 보낸 사람들은 대부분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던 부모들이었다. 도덕적 교화를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이 점에서 막달레나 수녀원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또 하나의 마녀사냥이었다.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었던 영화가 바로 2002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막달레나 시스터즈>다. 그 영화가 폭력의 실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냈다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이 영화는 폭력을 보여주기보다 마을의 풍경을 묘사한다. 수녀원의 끔찍한 내부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겨울의 거리, 석탄 가루 묻은 손, 빗물을 마시는 헐벗은 아이, 새벽의 흐릿한 강물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빌 펄롱의 얼굴을 오래 바라본다. 그는 영웅이 아니다. 그는 체제를 무너뜨릴 사람도 아니다. 그저 한 번, 눈을 돌리지 못한 사람일 뿐이다.
클레어 키건의 대표작이자 앞서 영화화되었던 <말없는 소녀>에서도 가족이 아니지만 친절하고 선한 부부가 등장한다. 이 부부 역시 아픔을 가지고 있고 그 아픔으로 말수가 없는 소녀를 자식같이 보살핀다. 빌과 빌의 엄마를 보살폈던 윌슨 부인 역시 마찬가지다. 남편을 잃은 슬픔, 개신교도이기 때문에 받는 소외감을 빌에게 애정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빌에게는 아버지 없이 자란 아픔이 있었다. 이제 빌의 차례이다. 가족은 아니지만 자신의 선한 의지를 베풀어야 하는 대상은 석탄 창고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교회는 두렵고, 공동체에서 밀려나는 것은 더 두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침묵한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고, 상점에는 선물이 쌓이고, 아이들은 학교에 간다. 평온한 일상은 계속된다. 그 일상 뒤편에서 누군가는 평생 세탁실에서 휴일도 없이 살아간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아이러니하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빌 펄롱이 마주한 질문은 거창하지 않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는 질문도 아니다. 질문은 훨씬 단순하다.
나는 무엇을 보고도 모르는 척할 것인가.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선택 역시 거창하지 않다. 너무 작고 사소해서 오히려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바로 그 사소함이 세상을 바꾸는 출발점이 된다.
종교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역사 속에서 종종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었다. 막달레나 수녀원 역시 그런 비극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종교 자체를 공격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대신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신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이 조용한 영화는 결국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킨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거대한 악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우리가 외면하기로 선택한 아주 사소한 순간들이다.
K People Focus 모하지 칼럼니스트 (mossisle@gmail.com)
영화와 음악을 사랑하며 아이들에게 독서와 글쓰기를 가르치는 희망의 칼럼니스트 .
케이피플 포커스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 표기 의무
■ 제보▷ 전화 : 02-732-3717
▷ 이메일 : mossisle@gmail.com
▷ 뉴스홈페이지 : https://www.kpeoplefocu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