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짧지 않은 시간을 중동에서 그 땅의 역사와 신앙을 연구해 온 학자이자, 지역 전문가로 살았다. 나는 최근의 사태를 바라보며 형언할 수 없는 비통함에 잠긴다. 한때 인류 문명의 요람이자 하나님의 기쁨이 머물던 그곳은 이제 첨단 기술과 해묵은 증오가 결합한 '거대한 화약고'이자 깊은 '영적 어둠'의 현장으로 변모했다.
본래 중동은 하나님과 인간이 온전히 연합했던 에덴동산, 즉 '거룩한 환희'의 처소였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 이후 최초의 살인과 저주가 시작된 비극의 땅이기도 하다. 가인이 세운 인류 최초의 도시는 하나님 없는 폭력의 문화를 낳았고, 이는 전 지구적 심판인 노아 홍수를 불렀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라라트산에서 인류를 재시작하셨고,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의 통로를 여셨으며, 가장 어두웠던 로마 시대에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이제 중동은 복음의 행진이 시작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거룩한 출발점이 되었다.
최근, 미·이스라엘 연합과 이란의 직접 충돌은 단순한 군사적 사건을 넘어, 우리가 믿어온 현대 문명의 평화가 얼마나 취약한 신기루인지를 폭로한다. 기독교 개혁 복음주의의 시각에서 이 비극의 이면을 직시해야 한다. 가장 경악스러운 점은 이스라엘 모사드가 테헤란의 교통 메라 을 해킹해 권력자의 일상을 해부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렌즈가 사실은 누군가의 식탁을 겨냥한 저격수의 눈이 되는 '디지털 파놉티콘'의 시대가 도래했다. ‘디지털 파놉티콘’이란 CCTV, 스마트폰, 인터넷, 빅데이터 등 디지털 기술을 통해 개인의 일상과 행동이 실시간으로 수집·감시되어 통제받는 현대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이제 전쟁은 전선이 아닌 '일상의 해킹'에서 시작된다. 기술은 '신의 눈'을 흉내 내고 있지만, 그것을 휘두르는 손은 '증오의 논리'에 장악되어 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생명을 수단으로 삼는 그 어떤 전쟁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 참된 평화는 압도적인 화력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자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서만 허락되는 하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중동 사태는 정의를 구현하는 싸움이 아니라, 나의 파멸로 타인의 파멸을 갚으려는 '공멸의 논리'에 가깝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로마서 12:19)" 하신 하나님의 공권력을 찬탈하고 스스로 심판자가 된 인간들의 복수는 결국 통제 불능의 소용돌이로 모두를 몰아넣을 뿐이다.
나는 이 참혹한 체스판 위에서 신음하는 평범한 영혼들을 본다. 에르빌의 공항에서, 테헤란의 거리에서 내일 아침 무사히 눈뜨기만을 기도하는 그들은 소모품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존엄한 생명들이다. 군사적 승리가 평화를 줄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이 연쇄 고리를 끊을 유일한 열쇠는 오직 '인도적 연대'와 '영적 각성'뿐이다.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을 향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애통함으로 채워져야 한다. 화염 속에서 울부짖는 아이들을 보며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던 주님의 눈물을 회복해야 한다. 지극히 작은 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명백한 신앙의 직무 유기다. 한 영혼의 아픔에 눈감고 기술적 압도만을 추구하는 문명은 반드시 무너진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유가를 계산하는 차가운 머리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뜨거운 가슴이다. 중동의 붉은 새벽은 우리에게 묻는다. "저 지평선 너머의 비명을 외면한 채, 당신만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증오의 미사일 대신 이해의 손길을, 드론의 비명 대신 평화의 노래를 중동의 하늘에 띄워야 한다. 그것이 문명의 요람이었던 그 땅에 대한 예의이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영화 ‘미션’의 마지막 대사를 빌려, 전쟁을 자행하는 모든 이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외치고 싶다.
“만약 정의의 이름으로 폭력이 사용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