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은 남지만, 기록은 남지 않는다
국가는 거대한 기억 장치다. 우리는 흔히 국가를 법과 제도, 예산과 통계로 이루어진 조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국가는 ‘기억’으로 작동한다.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무엇이 실패했고 무엇이 성공했는지, 어떤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기억함으로써 정책은 수정되고 제도는 보완된다. 문제는 그 기억이 얼마나 정확하고, 얼마나 온전히 보존되느냐에 있다.
행정 현장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경험은 모두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공문서에는 결과가 남지만, 과정은 사라진다. 보고서에는 성과가 정리되지만, 시행착오는 축약된다. 회의록에는 결론이 적히지만,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고민과 갈등은 빠진다. 기록되지 않은 경험은 결국 개인의 기억 속에 머물다가 인사 이동과 함께 흩어진다.
국가의 정책은 반복되는데, 현장의 교훈은 반복되지 않는다. 새로운 담당자가 같은 문제를 다시 검토하고, 비슷한 시행착오를 되풀이한다. 이때 우리는 묻게 된다. 국가는 과연 기억하고 있는가. 아니면 매번 처음처럼 시작하고 있는가.
문서 중심 행정의 구조적 한계
대한민국 행정은 문서 중심 체계 위에 서 있다. 공문서, 결재 문서, 정책 보고서, 법령과 고시가 국가 기억의 핵심 저장소다. 문서 체계는 국가 운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장치다. 특히 규범과 기준의 정비는 국가 운영의 기본이다.
예컨대 국립국어원이 발간한 『한글 맞춤법·표준어 규정 해설』을 보면, 규정과 해설은 단순한 설명을 넘어 사회적 합의와 언어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는 장치로 기능해 왔다. 규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언어 생활을 반영하며 수정된다. 이는 국가가 기록을 통해 사회 변화를 기억하고 조정해 온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규정과 제도는 어디까지나 정제된 결과물이다. 그 안에는 토론의 긴장, 현장의 갈등, 적용 과정의 어려움이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또한 ‘문장 문법성 판단 자료 구축’ 사업처럼 수만 건의 문장을 수집해 통계화하는 작업은 객관성과 재현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평가자들이 겪은 혼란이나 현장의 맥락은 수치로 환원된다. 데이터는 남지만 판단의 배경은 흐릿해진다.
이처럼 국가 기록은 표준화와 객관화를 통해 정제된다. 그러나 정제의 과정에서 맥락은 축소되고 경험은 단순화된다. 행정 경험은 복합적이지만 기록은 선형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 기억의 한계가 드러난다.
경험이 사라질 때, 정책은 반복된다
기록되지 않은 경험은 개인의 머릿속에 머문다. 담당자가 바뀌면 경험은 이동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정책은 단절되고, 제도는 매번 새롭게 설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사한 오류를 반복한다.
예를 들어 맞춤법 교정 말뭉치 구축 사업에서도 자동 교정과 수작업 교정을 병행하고, 품질 검수를 반복하며, 데이터 구조를 개선하는 단계적 시행착오가 있었다. 보고서에는 그 과정이 정리되어 있지만, 어떤 판단 기준으로 수정이 이루어졌는지, 어떤 갈등과 조정이 있었는지까지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또 다른 사례로 표준 국어 문법 개발 과정 역시 여러 차례의 자문회의와 워크숍을 거치며 쟁점을 조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어떤 쟁점이 왜 논쟁이 되었는지, 어떤 대안이 폐기되었는지까지는 문서만으로 완전하게 복원하기 어렵다.
이러한 단절은 정책의 비효율로 이어진다. 동일한 사안이 부처를 바꿔 다시 논의되고, 이미 검토된 쟁점이 또다시 검토된다. 국가가 기억을 충분히 축적하지 못할 때, 행정은 경험 축적형 조직이 아니라 순환형 조직으로 머문다.
국가 기억을 확장하기 위한 조건
그렇다면 국가는 어떻게 더 잘 기억할 수 있을까. 답은 단순히 기록을 늘리는 데 있지 않다. 기록의 ‘질’과 ‘방식’을 바꾸는 데 있다.
첫째, 과정 기록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단순한 결과 보고서가 아니라, 의사결정 과정과 대안 검토 내역을 체계적으로 보존해야 한다. 실패 사례 역시 자산으로 관리해야 한다.
둘째, 디지털 기반의 지식 관리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텍스트 중심 기록을 넘어, 데이터와 맥락을 함께 보존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정책 초안, 토론 내용, 현장 적용 결과를 연동하는 통합 기록 체계가 요구된다.
셋째, 개인의 경험을 조직의 자산으로 전환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인사 이동 시 단순 업무 인수인계를 넘어, 정책적 판단과 배경 맥락을 공유하는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넷째, 현장 기록의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 현장 공무원, 연구자, 사업 수행자의 경험을 정성적 데이터로 축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 정책 설계의 참고 자료가 되어야 한다.
국가의 경쟁력은 예산 규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기억의 축적 수준이 곧 정책의 진화 수준이다. 잘 기억하는 국가는 반복하지 않는다. 축적하고 개선한다.

국가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국가는 거대한 문서 창고가 아니다. 국가의 기록은 단순한 보존이 아니라 학습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결과만 남기는 행정은 과거를 요약하지만, 과정을 남기는 행정은 미래를 준비한다.
기록되지 않는 경험은 사라진다. 사라진 경험은 다시 반복된다. 그리고 반복은 비용이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책이 아니라, 더 깊은 기억이다. 국가가 자신의 시행착오를 체계적으로 기억할 수 있을 때, 정책은 축적되고 행정은 성숙한다.
국가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성공의 수치만인가, 아니면 실패의 맥락까지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대한민국 행정의 미래를 결정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