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서울의 한 사립대 동양화과 실기실. 응당 코끝을 스쳐야 할 은은한 묵향 대신, 건조한 타자 소리만이 공간을 메운다. 캔버스와 화선지를 마주하고 고뇌하는 예술가의 모습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학생들은 붓을 들기 전 노트북을 열고 생성형 AI 미드저니(Midjourney)에게 수십 개의 시안을 요구한다. "매화의 고독한 이미지를 수묵담채화 풍으로 생성해 줘." 명령어가 입력되자마자 모니터 위로 수많은 그림이 쏟아진다. 학생의 역할은 붓질이 아니라, AI가 내놓은 결과물 중 가장 완벽한 구도를 골라내는 '선별'이다.
이러한 풍경은 비단 미대만의 것이 아니다. 인문학의 정수라 불리는 국문과 강의실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연출된다. "봄비 내리는 밤의 고독"을 주제로 한 시(詩) 창작 수업, 학생들은 챗봇과의 대화를 통해 시상을 다듬고 문장을 퇴고한다. 2026년의 대학가는 이토록 변했다. 순수 예술의 마지막 보루라 여겨졌던 미대와 인문대가 생존을 위해 AI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파격적인 변화의 기저에는 명징한 현실 논리가 자리한다. 바로 '취업'과 '생존'이다. 웹툰, 게임 원화, 웹소설 등 상업 예술계는 이미 신입 작가들에게 'AI 활용 능력'을 필수 역량으로 요구하고 있다. 한 미대 교수의 토로처럼, 과거의 인재가 '붓질 잘하는 장인'이었다면, 이제는 AI라는 고성능 조수를 능수능란하게 부리는 '디렉터(Director)형 인재'를 길러내야만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학생들 역시 처음의 거부감을 넘어, 막힌 아이디어를 뚫어주는 파트너로서 AI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바야흐로 "그리는 시대가 가고 지시(Directing)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나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은 법이다. 교육 현장의 효율성이 높아질수록, "과연 이것을 학생 본인의 창작물로 볼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또한 묵직하게 제기된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적응의 문제를 넘어선, 예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철학적 논쟁이다.
최근 미국 케니언 칼리지(Kenyon College)의 교수들이 학내 신문을 통해 벌인 토론은 이 지점을 정확히 타격한다. 핵심 쟁점은 바로 '주도권(Sovereignty)'이다. 한 문예창작과 교수는 학생들이 고민 없이 AI가 뱉어낸 문장을 그대로 차용하는 세태를 비판하며, 이는 창작이 아니라 "AI의 하청 업체로 전락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인간 고유의 사유와 고뇌가 생략된 결과물에 예술의 혼이 깃들 수 없다는 경고다.
반면, 기술 낙관론의 입장도 팽팽하다. 사진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 회화는 죽었다고 했지만, 결국 화가들은 사실적 묘사에서 벗어나 추상화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AI 역시 인간의 상상력을 확장시켜 주는 강력한 도구일 뿐이며,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라는 주장이다.
분명한 것은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2026년의 예술 교육은 기술을 배척할 수도, 기술에 무비판적으로 종속될 수도 없는 딜레마 위에 서 있다. 국내외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볼 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새로운 리터러시(Literacy)'의 함양이다.
이제 학교는 학생들에게 '잘 그리는 손'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AI에게 '좋은 질문(Prompt)을 던지는 법'과 쏟아지는 'AI의 결과물을 비판적으로 선별(Curation)하는 눈'을 길러주어야 한다.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성은 바로 '안목'과 '질문하는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붓 대신 프롬프트를 든 2026년의 미대생들. 그들이 AI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될지, 아니면 거인의 힘에 압도되어 길을 잃게 될지는 지금 우리 교육이 어떤 나침반을 쥐여주느냐에 달려 있다. 협업과 종속의 갈림길, 우리 대학은 지금 그 위태롭지만 중요한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