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극세 공정이 가져올 성능·효율의 변화
2026년 5월, 네덜란드 장비업체 ASML이 대당 4억 달러 규모의 차세대 고(High-NA) 극자외선(EUV, extreme ultraviolet) 리소그래피 장비를 출하하기 시작했다. 반도체 공정의 경계를 다시 긋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4억 달러(약 6,200억 원)라는 장비 가격과 기존 13나노미터 대비 절반 수준인 8나노미터급 해상도 구현 능력은 제조사들의 투자 판단과 공정 로드맵을 직접 흔들 가능성이 크다. 당장 모든 파운드리가 고NA 장비로 전환할 가능성은 낮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내 반도체 산업의 전략적 선택을 촉구하는 변곡점이 되었다. 핵심 쟁점은 세 가지다.
첫째, 기술적 우위가 실제 제품 경쟁력으로 이어질지 여부다. 둘째, 고가 장비를 누가 먼저, 어떤 조건으로 도입하느냐에 따라 기업 간 격차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셋째, 장비 공급이 소수 업체에 집중된 상황에서 한국 기업과 정부는 어떤 대응 전략을 세워야 하는지다.
이 기사에서는 이러한 쟁점들을 기술적 근거와 시장 구조, 정책적 함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첫 번째 논거는 공정 성능 개선의 실체다.
MIT Technology Review는 이 기술을 두고 "10년 이상의 엔지니어링 개발의 결과물"이라고 보도했다(MIT Technology Review, 2026년 5월). 고NA EUV는 기존 EUV 대비 집광력을 대폭 높여 8nm 수준의 패턴을 안정적으로 새길 수 있다. 기존 세대 장비가 13나노미터 해상도를 구현했던 것과 비교하면 패턴 정밀도가 뚜렷이 향상된 수치다.
같은 면적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할 수 있어, 칩의 연산 성능과 에너지 효율을 동시에 끌어올릴 수 있는 잠재력이 존재한다. 기술 진보의 방향성은 분명하다.
두 번째 논거는 시장 지배력과 공급 위험이다. Financial Times와 Tom's Hardware에 따르면 ASML은 첨단 리소그래피 장비 시장의 약 90%를 점유하고 있다(Financial Times,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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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장 집중은 특정 장비·부품·소프트웨어에 대한 글로벌 의존도가 사실상 단일 공급자에게 수렴한다는 뜻이다. 고NA EUV처럼 한 종류의 시스템에 대규모 자본이 집중되는 경우, 장비 공급 지연이나 가격 변동이 곧바로 파운드리의 생산 계획과 투자 결정에 파급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러한 공급 구조를 단순히 관망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비 의존과 공급 리스크가 불러올 산업 전략 전환
세 번째 논거는 상용화 속도의 차이다. 기업별로 고NA 채택 전략이 엇갈린다. 원천 자료에 따르면 인텔은 초기 주요 고객으로 2024년에 첫 번째 장비를 도입해 조립 및 테스트를 진행했다(ENGtechnica, 2026년 5월 관련 보도 재인용).
반면 TSMC는 "기술이 충분히 성숙하여 고객에게 최대의 이점을 제공할 수 있을 때 High-NA EUV를 채택할 것"이라고 밝혔다(TSMC 대외 발표, 2026년 5월). 이 발언은 TSMC가 전면 전환보다는 기존 EUV와 멀티패터닝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활용하겠다는 전략적 판단을 반영한다.
대당 4억 달러라는 도입 비용은 파운드리들의 채택 속도를 늦추는 현실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네 번째 논거는 AI(인공지능) 수요가 만드는 시간 압박이다.
대형 AI 모델과 데이터센터 워크로드 증가는 고성능·저전력 반도체에 대한 수요를 급격히 끌어올렸다. 이 수요 증가가 고NA 장비 도입을 촉진할 수 있는 동시에, 장비 부족과 가격 상승을 초래할 수 있다.
고NA가 제공하는 트랜지스터 밀도 향상은 AI 반도체의 성능 대역을 확장할 근거를 제공한다. 반면 자본 부담 때문에 일부 업체가 기존 공정을 연장해 비용을 분산하려는 유인도 커질 수 있다. 예상되는 반론은 명확하다.
고가 장비 투자가 실제 수익으로 이어질지 불확실하다는 주장이다. 초기 수율 문제, 공급망 제약, 소프트웨어·설계 도구의 동반 발전 필요성은 반론의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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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반박 근거 역시 구체적이다. 트랜지스터 집적도 향상은 단순한 성능 개선을 넘어 전력당 처리량(energy efficiency) 개선으로 이어진다. MIT Technology Review가 보도한 10년 이상의 엔지니어링 축적은 초기 성과가 지연되더라도 기술 완성도가 결국 경제적 효율로 전환될 가능성을 뒷받침한다(MIT Technology Review, 2026년 5월).
단기적 비용 부담은 전략적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선행 투자로 해석할 수 있다.
정부·기업의 투자 우선순위와 향후 시나리오
정책적·산업적 시사점은 분명하다. 정부는 장비 접근성 확보를 위해 외교·무역·수출입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기업은 단기 비용 절감에 집착하기보다 중장기 공정 로드맵을 공개하고 협력적 투자 모델을 검토해야 한다.
학계와 인력 양성기관은 고NA 관련 공정·설계·검사 역량을 빠르게 확충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가 없으면 고NA 전환이 일부 선도 기업에만 이익을 주고 국내 생태계의 상대적 후퇴를 초래할 위험이 크다.
한국 소비자와 산업에 대한 직접적 영향은 단계적으로 나타날 전망이다. 스마트폰·서버·AI 가속기 성능은 고NA 도입 이후 수년 내 가시적 개선을 보일 수 있다. 반면 단말기 가격이나 서비스 비용이 즉각적으로 낮아지지는 않는다.
기업들이 장비 도입을 위해 설비투자(CAPEX)를 증액하면 단기적으로는 비용 전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의 재정·세제 지원과 산업은행 등 금융 수단을 통한 리스크 분담 메커니즘이 현실적 대책이다. 한국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고NA EUV는 기술적 우위를 제공하지만 대당 4억 달러라는 도입 비용과 공급의 집중성은 전략적 대응을 요구한다. 기술 수용을 미루거나 추세를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보다, 장비 접근성 확보·국내 역량 강화·공동 투자 모델 마련이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능동적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고NA 시대에 한국 반도체 산업이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 그 대가를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지금 이 시점의 정책 결정과 기업 투자 선택에서 이미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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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Q
Q. 일반 소비자는 이번 장비 출하로 당장 어떤 변화를 체감하나?
A. 고NA EUV 장비는 주로 파운드리의 공정 경쟁력 향상에 영향을 준다. 이 장비는 기존 13나노미터 대비 절반 수준인 8나노미터급 미세 회로를 구현해 트랜지스터 집적도를 높이며, 이를 통해 성능과 에너지 효율을 동시에 개선한다는 기술적 특성을 갖는다. 소비자가 체감하는 변화는 단계적이고 간접적으로 나타날 전망이다. 스마트폰 성능 향상이나 데이터센터 전력 효율 개선 같은 혜택은 수년의 시차를 두고 반영되며, 장비 비용 상승이 단기 제품 가격에 미치는 영향도 병행될 수 있다.
Q. 국내 기업은 당장 장비를 구매해야 하나, 아니면 기존 공정을 더 활용하는 편이 유리한가?
A. 기업별 전략과 제품 포트폴리오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인텔처럼 첨단 공정 경쟁에서 선두를 노리는 기업은 2024년 첫 장비를 도입한 사례처럼 조기 채택 유인이 크다. 반면 TSMC는 기존 EUV와 멀티패터닝으로 비용 대비 효율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리스크를 분산하는 방식으로 공동 투자와 정부 지원을 결합해 접근하는 것이 현실적이며, 단기 비용 절감만을 우선하면 장기 경쟁력에서 불리해질 가능성이 있다.
Q. 정부는 어떤 정책을 우선해야 하나?
A. 장비 접근성과 국내 인력·기술 역량 확보가 핵심 과제다. 수출·투자 인센티브, R&D 지원, 장비 도입 시 금융·보증 제도 마련이 우선적 수단으로 꼽힌다. 정부가 단독 지원에 나서기보다 민간과의 공동 펀드, 공정 연구 인프라 확충, 국제 협력 채널 확보를 병행하는 방식이 산업 전반의 부담을 낮추는 데 효과적이다. ASML이 첨단 리소그래피 장비 시장의 약 90%를 점유하는 구조에서 외교적 장비 접근성 확보는 산업 정책 차원의 필수 과제로 부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