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로변 5m가 운명 갈랐다” 같은 강남인데 전화 끊긴 빌딩들, 공실의 역설
테헤란로 강남대로 ‘초프라임’만 살아남았다
이면도로 오피스는 1년 넘게 텅텅 강남 부동산 내부서도 양극화 심화
서울 강남의 빌딩 시장이 극단으로 갈라지고 있다. 같은 강남, 같은 테헤란로인데도 대로변에 붙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건물의 운명이 완전히 엇갈리고 있다. 불과 5~10m 차이로 임차 문의가 끊기고, 공실이 1년 넘게 이어지는 사례까지 속출하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 입지로 불리는 강남 한복판에서도 ‘선택받은 빌딩’만 살아남는 냉혹한 시장 재편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 강남역 5번 출구 인근 A빌딩. 역세권과 불과 100m 거리인 이 건물의 전용면적 15평 규모 사무실은 1년 넘게 비어 있다. 위치만 놓고 보면 강남 핵심 상권이다. 그러나 대로변에서 한 블록 비켜났다는 이유만으로 임차 문의조차 사실상 끊겼다.
인근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강남역 출구 바로 앞 대로변 빌딩은 공실 자체를 찾기 어렵다”며 “좋은 매물은 나오자마자 계약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어 “반면 이면도로 오피스는 임대료를 계속 낮춰도 찾는 기업이 거의 없다”고 전했다.
한때 ‘공실 걱정이 없는 시장’으로 여겨졌던 강남 오피스 시장 내부에서 K자형 양극화가 뚜렷해지고 있는 모습이다. 초대형 프라임 오피스는 공급 부족 현상이 이어지지만, 노후 중소형 빌딩은 빠르게 외면받고 있다.
상업용 부동산 자문사 NAI코리아에 따르면 강남대로변 프라임 오피스 공실률은 0.72%에 불과하다. 사실상 만실 상태에 가깝다. 반면 한국부동산원이 발표한 올해 1분기 강남대로 전체 오피스 공실률은 4.1%였다. 대로변 핵심 자산을 제외하면 실제 체감 공실률은 이보다 훨씬 높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정은상 NAI코리아 리서치센터장은 “강남대로 프라임 오피스는 심각한 공급 부족 상태”라며 “반면 이면도로 소형 빌딩과 노후 오피스는 임차인 이탈이 이어지며 시장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테헤란로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테헤란로 오피스 공실률은 4.8%로 집계됐다. 수치상으로는 높지 않아 보이지만 현장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강남대로 일대 중개업소 대표는 “전용 8평, 10평, 20평 규모 소형 사무실 공실이 상당하다”며 “1년6개월 넘게 임차인을 못 구한 사례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전문가들은 기업들의 ‘입지 쏠림’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특히 IT 금융 스타트업 업계일수록 강남 핵심 입지를 단순 사무공간이 아니라 ‘기업 경쟁력’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실제 벤처기업과 스타트업들은 투자사 접근성과 네트워크 효율성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강남 대로변 프라임 빌딩 입주 자체가 투자 유치와 기업 이미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정 센터장은 “스타트업과 첨단산업 기업들은 벤처캐피털(VC), 사모펀드(PE) 등 대형 자본과 가까이 있으려는 경향이 강하다”며 “강남 핵심 입지는 단순 주소지가 아니라 비즈니스 플랫폼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오피스의 ‘간판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대기업과 유명 IT기업들이 입주한 빌딩일수록 직원 채용과 기업 신뢰도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인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한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기업들은 좋은 오피스가 회사 평판까지 끌어올린다고 생각한다”며 “강남 대로변 입주가 어렵다면 차라리 신축 오피스가 많은 마곡이나 고덕강일지구로 이동하려는 수요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양극화가 앞으로 더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강남권역(GBD) 일대에 신규 프라임 오피스 공급이 대거 예고돼 있기 때문이다.
CBRE코리아에 따르면 테헤란로 지구단위계획 재정비와 역세권 활성화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강남권 개발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특히 서울 최고 수준인 용적률 1800% 허용과 높이 제한 완화 정책은 노후 건물의 프라임 오피스 전환을 강하게 압박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여기에 서초구 서리풀특별계획구역과 한국감정원 부지 개발까지 더해지면서 GBD 업무지구는 지속적으로 확장될 전망이다.
결국 살아남는 건 ‘초핵심 입지’라는 분석이 나온다. 강남이라는 이름만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이 되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의미다.
김효선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이면도로와 배후지역에는 꼬마빌딩이 많아 대기업 수요를 받기 어렵다”며 “비대면 업무 확산으로 중소형 오피스 수요 자체도 감소하는 흐름”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정 업종 특화지역 육성과 금융 지원 등 공공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남 부동산의 진짜 민낯은 이제 아파트 가격이 아니라 ‘같은 거리 안에서도 갈라지는 생존 격차’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불과 몇 걸음 차이로 공실과 완판이 엇갈리는 시장. 강남의 양극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더 깊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