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점점 더 매끄럽고 빠른 것들을 사랑합니다. 인공지능이 몇 초 만에 유려한 문장을 쏟아내고, 서점에는 이미 짜인 각본처럼 DIY 구성이 완료된 키트들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그 친절한 가이드라인을 따라 조립하고 오려 붙이며 그것을 창작이라 부르곤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고유한 창작이라기보다, 잘 정리된 공정을 수행하는 꾸미기의 즐거움에 가깝습니다. 효율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이 숨 가쁜 세상에서, 아이들의 글쓰기마저 논술이나 입시라는 틀 안에서 정해진 산출물을 강요받는 현실을 마주할 때면, 저는 종종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짐을 느낍니다.

어른들의 글쓰기와 아이들의 글쓰기는 그 출발선부터가 다릅니다. 성인들의 이야기는 대개 잘 정제된 논리와 문법 위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의 생각은 그런 포장도로 위를 달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에서 시작되기도 하고,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낯선 곳에 불시착하기도 합니다. 어른의 눈으로 볼 때는 정리되지 않은 혼란일지 모르나, 바로 그 지점에 인공지능은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호흡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에게 기승전결의 완벽한 작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의 마법을 뿌리며 그 어린 발자국을 조용히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놀면서 중얼거리는 말이나 즉석에서 지어내는 엉뚱한 규칙들은 무심한 어른들의 눈에는 그저 아이가 흘리고 다니는 하찮은 빵부스러기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의 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아이의 상상 세계에서 쏟아져 나온 귀하디귀한 보석가루입니다. 효율을 따지는 세상은 이 빵부스러기를 청소해야 할 먼지로 취급하지만, 우리는 이 반짝이는 가루를 발견하는 즉시 아이가 그것을 글로 붙잡아둘 수 있게 도와야 합니다.
이 과정은 결코 투입 대비 산출이라는 경제 논리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철학자 강신주는 그의 저서 감정수업에서 사랑은 서로를 주목하는 것이고, 나아가 서로를 숭배하며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글쓰기를 돕는다는 것은 바로 이 정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아이가 쏟아내는 빵부스러기 같은 사소한 이야기들에 온전히 주목하고, 그것을 보석처럼 귀하게 여겨 기록해 주는 행위야말로 아이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가장 구체적인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을 매뉴얼처럼 정리하여 순서대로 따라 한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같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20년의 노하우를 가진 누군가가 기술적인 방법을 가르쳐 준다 해도, 그 안에 아이를 향한 온전한 몰입인 주목과 숭배가 없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어떠한 고유한 이야기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의 작업 전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며 눈을 떼지 않을 때, 비로소 막연한 칭찬이 아닌 실질적인 신뢰감이 싹틉니다. 넌 할 수 있어, 잘 될 거야라는 빈말이 아니라, 아이가 이야기를 짓기 위해 고민했던 시간과 그 엉뚱한 세계를 곁에서 지켜본 사람만이 보낼 수 있는 진정성 있는 표정이 아이의 마음을 채우게 됩니다. 아이들 또한 부모가 자신의 성장 과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에, 둘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양육자와 피양육자를 넘어 창작의 동반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결국, 아이들의 글쓰기를 돕는다는 것은 초짜 작가들을 지켜보며 그들의 생각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데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아이가 쓴 글의 논리적 완성도를 논하기 이전에, 그 아이가 만들어낸 세계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관객이 되어야 합니다. 효율성의 잣대를 내려놓고, 아이가 흘린 상상의 빵부스러기를 주워 담으며 그 길을 함께 걷는 것. 그 서툰 발자국을 묵묵히 따라가는 시간이야말로, 아이들이 우리 어른들에게 가장 바라는 모습일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