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결 위에 피어난 향기, 천리향이 머문 순간의 공기

보이지 않는 향기의 존재, 시각으로 느껴지는 공기의 결

항아리와 천리향, 채워짐보다 비움으로 남는 이야기

색과 질감이 빚어낸 시간의 층위, 기억의 표면을 스치는 감각

 

<천리향> 20호. 아크릴, 옻, 황토

 

 

정물화는 언제나 ‘멈춘 시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천리향은 멈춰 있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가 화면을 넘어 번져가며, 공기의 흐름까지 시각적으로 감지된다. 작가는 색과 질감을 통해 ‘향기의 존재’를 재현하고, 사라짐과 기억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담아낸다.


그 중심에는 항아리가 있다. 비어 있는 듯하지만, 그 안에는 이미 빠져나간 향기와 시간의 잔상이 머물러 있다. 천리향의 생명력은 그 빈 공간과 대조되며, 공기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작품의 첫인상은 강렬하지 않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시선은 천리향의 표면과 항아리의 질감에 머문다. 작가는 붓질 대신 두텁게 쌓인 물감의 결을 이용해 향기의 ‘촉감’을 형상화했다. 이 질감은 오랜 시간 굳어진 기억의 표면처럼 갈라져 있다.


그 틈새로 번지는 주황빛은 생의 온기를 품은 색이다. 하지만 완전히 익은 듯 보이는 과일의 색은 동시에 시듦을 예감하게 한다. 천리향의 향기가 가장 짙을 때가 바로 사라짐의 문턱이라는 점을 작가는 알고 있다. 항아리는 작품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가장 조용한 존재다. 안이 비어 있는 듯하지만, 그 속은 공기로 가득 차 있다. 작가는 이 ‘보이지 않는 채움’을 통해 기억의 구조를 암시한다.


무엇인가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이미 빠져나간 것의 흔적을 기억하는 공간. 항아리는 향기를 붙잡지 못하지만, 향기가 머물렀던 공기의 결을 기억한다. 천리향의 향이 사라져도 항아리는 여전히 그 순간의 공기를 품고 있다. 이 대비는 삶과 예술, 존재와 부재의 순환을 은유한다. 푸른 회색의 바탕 위에서 천리향의 주황빛은 도드라지지만 결코 밝지 않다. 

 

빛의 온도를 낮추어, 계절을 특정하지 않은 시간의 풍경을 완성한다. 작가는 색의 온도차를 통해 ‘시간의 결’을 표현했다. 화면 곳곳에 남은 균열은 단순한 질감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스쳐 지나가며 남긴 흔적이며, 감정의 표면이기도 하다. 마치 감귤 껍질의 갈라진 결이 배경의 균열과 이어지듯, 사물과 시간, 감정과 기억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 정물화는 결국 한 인간의 내면이 굳어지는 과정을 닮았다.


 

천리향의 향기는 금세 사라지지만, 그 향이 머물렀던 공기는 오랫동안 남는다. 이 작품은 바로 그 ‘남음’을 그린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도이자, 사라짐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감각의 찬가다.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기억 속에도 향기가 남아 있습니까?” 시간이 지나도 색이 바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삶의 냄새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 천리향은 여전히 공기를 타고, 우리의 감각 속으로 번져간다.

 

 

 

작성 2026.02.12 15:47 수정 2026.02.1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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