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이란 기술 : 관계 회복을 위한 인간의 철학적 노력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다.”
이 문장은 독일 철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남긴 말이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으로 이해하지만, 프롬은 사랑을 ‘배워야 하는 행위’, 즉 하나의 능력으로 정의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연결’되어 있다.
소셜 미디어, 메신저, 영상통화,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누구와도 즉시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관계의 단절과 고립감을 호소한다.
이 현상은 단순한 심리적 문제를 넘어 철학적 위기를 반영한다.
‘관계’는 단순히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사랑이 기술이라면, 우리는 지금 그 기술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정을 ‘덕의 실천’이라 했다. 인간은 고립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완성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회복은 곧 인간이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는 철학적 행위다.
또한 20세기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인간은 ‘나-너’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한다”고 말했다. 즉, 타인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이 철학적 통찰은 ‘사랑의 기술’을 단순한 감정 조절이 아닌, 존재론적 이해의 문제로 끌어올린다. 사랑은 타인을 통제하거나 소유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다.
21세기 사회는 기술적으로 ‘초연결’되었지만, 심리적으로는 ‘초고립’되었다.
스마트폰의 메시지 알림이 끊이지 않아도, 인간은 점점 더 외로워진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현대의 ‘연결’은 정보의 교환에 머무를 뿐, 감정의 교류와 존재의 이해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기술’을 잃었고, 상대의 고통에 머물러 주는 인내를 배우지 못했다.
철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단절은 ‘인간 이해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 앞에서 인간은 윤리적으로 깨어난다”고 했다.
즉, 사랑과 관계의 회복은 타인의 고통을 응시할 용기에서 시작한다.
오늘날의 사랑은 속도와 효율의 논리에 갇혀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기술은 느림, 배려, 경청이라는 오래된 인간의 미덕을 되찾는 데 있다.
사랑은 배움이다. 그것도 단 한 번 배우는 것이 아니라, 평생 반복해야 하는 훈련이다.
프롬은 “사랑은 단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능력’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곧 사랑이 노력의 산물임을 뜻한다.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
상대의 결함을 판단 대신 이해로 대하는 훈련,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며 관계를 존중하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이러한 학습은 단순한 감정 조절이 아니라, 철학적 자기 성찰의 결과다.
‘나는 왜 사랑하려 하는가?’, ‘나는 타인을 진정 이해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질 때, 인간은 비로소 사랑의 철학자가 된다.
현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는 사랑을 “타인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혁명적 행위”라고 말했다.
즉, 사랑의 기술이란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 인간됨을 인정하는 용기다.
결국, 사랑의 기술은 ‘인간다움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다.
관계는 감정의 유희가 아니라 존재의 실천이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하려는 방식으로 배워왔지만, 이제는 ‘함께 존재하는 기술’로 다시 배워야 한다.
관계의 회복은 철학적 노력의 결정체다.
그것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가장 깊은 시도이며,
결국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내면의 여행이기도 하다.
사랑은 기술이다.
그리고 그 기술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계속 배워야 할 가장 어려운 기술이다.
이 기술이야말로 인간 문명이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적 기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