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해 보이는 노년은 누구의 얼굴인가
요즘 광고 속 노년은 유난히 바쁘다. 백발의 부부는 등산화를 신고 산을 오르고, 은퇴한 중년은 스타트업 강연장에 선다. 액티브 시니어라는 이름 아래, 노년은 더 이상 쉼의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젊은 시절보다 더 생산적이고, 더 건강하며, 더 소비적인 삶이 이상적인 모델처럼 제시된다.
이 이미지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늙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희망이다. 하지만 이 희망은 어느 순간부터 은근한 압박으로 변한다. 왜 어떤 노년은 활기차고, 어떤 노년은 그렇지 못한가. 활기차지 못한 노년은 개인의 선택 실패인가, 아니면 구조의 문제인가.
액티브 시니어 담론은 긍정적이다. 노년을 무기력의 시대로만 보던 오래된 시선을 바꿨다. 그러나 이 담론이 지나치게 강해질수록, 그 이면에 가려지는 얼굴들이 있다. 병원 대기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노인, 폐지를 줍는 노인,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 안에서 하루를 버티는 노인이다. 이 칼럼은 바로 그 가려진 얼굴에서 출발한다.
액티브 시니어는 어떻게 표준이 되었나
액티브 시니어라는 개념은 고령화 사회의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등장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노년을 ‘부양의 대상’이 아니라 ‘활동 가능한 인구’로 재정의할 필요가 생겼다. 국가 재정, 연금, 의료 부담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흐름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 담론은 특히 빠르게 확산됐다. 고령화 속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고령 인구 비율은 이미 초고령 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부 정책, 미디어, 기업 마케팅은 공통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건강하고, 소비하고, 일할 수 있는 노년이다.
문제는 이 이미지가 평균이 아니라는 점이다. 액티브 시니어는 특정 조건을 가진 집단의 모습이다. 안정적인 연금, 축적된 자산, 건강, 사회적 관계가 있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활동적인 노년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담론은 이 전제를 잘 말하지 않는다. 대신 “마음먹기에 달렸다”, “준비하면 된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그 순간 노후의 불평등은 개인 책임으로 환원된다.
다양한 관점 통합: 숫자 뒤에 숨은 노년의 현실
공식 통계는 종종 긍정적인 신호를 보여준다. 고령자 경제활동 참가율은 증가했고, 노년층 여가 산업도 성장하고 있다. 이런 지표만 보면, 많은 노인이 활발히 사회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같은 통계의 다른 면을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온다. 한국은 노인 빈곤율이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다. 일하는 노인의 상당수는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일한다. 경비, 청소, 단기 일용직 같은 저임금 노동이 대부분이다.
전문가들은 액티브 시니어 담론이 노후 격차를 가리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 활기찬 소수의 사례가 과도하게 확대 재생산되면서, 다수의 불안정한 노년은 보이지 않게 된다. 미디어는 밝은 얼굴을 보여주지만, 정책은 그 얼굴을 기준으로 설계된다. 결과적으로 도움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제도 밖으로 밀려난다.
노년 내부의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건강 격차, 자산 격차, 정보 격차가 동시에 작동한다. 이 격차는 노년기에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평생 누적된 불평등의 결과다.
‘활동성’이 기준이 될 때 생기는 문제
활동적인 노년을 이상형으로 설정하는 순간, 그렇지 못한 노년은 실패한 삶처럼 취급된다. 아프면 자기 관리가 부족한 것이고, 가난하면 준비를 못 한 결과가 된다. 이 인식은 사회적 연대를 약화시킨다.
더 큰 문제는 정책 방향이다. 노인을 더 오래 일하게 만드는 정책은 늘어나지만, 돌봄과 소득 안전망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강화된다. ‘일할 수 있으니 일하라’는 논리는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모든 노인이 같은 조건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진정한 문제는 활동 여부가 아니라 선택 가능성이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쉬어도 되는 권리, 아파도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가 있는가. 액티브 시니어 담론은 이 질문을 뒤로 미룬다.
노년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더 젊게 사는 노년이 아니라, 각자의 상태에 맞게 존중받는 노년이다. 활기찬 노년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노년을 준비하고 있는가
액티브 시니어 신화는 희망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기준이 되어버렸다. 기준은 언제나 누군가를 배제한다. 우리는 그 배제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모두가 행복한 노년을 살 수 있는 사회는 모두가 똑같이 활동적인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각자의 속도로 늙을 수 있는 사회다. 많이 움직여도, 거의 움직이지 않아도, 여전히 존중받는 사회다.
이 질문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지금의 중년과 청년은 어떤 노년을 상상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상상이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부담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노년은 성취의 연장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국면이다. 그 국면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는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지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