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우리는 새해 첫날, 꼭 같은 음식을 먹어왔을까.”
정초에 먹는 음식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를 미신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형식적인 전통이라 치부하지만, 이 반복된 식탁에는 한 사회가 시간을 이해하고 삶을 설계해온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새해 첫날 아침,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떡국을 앞에 두고 숟가락을 드는 행위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이제 새로운 해로 들어간다’는 공동의 선언에 가깝다.
음식은 말보다 먼저 사회의 규칙을 가르친다. 정초 음식은 그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이고도 정직한 문화적 언어였다.정초는 시간의 경계다. 어제와 오늘, 지난해와 새해를 가르는 이 모호한 지점에서 사람들은 늘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인간은 그 경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을 만들었고, 가장 확실한 방식으로 그것을 몸 안에 들였다. 먹는다는 행위는 믿음이 되고, 반복은 규범이 된다. 정초 음식은 그렇게 만들어진 생활 속의 질서였다
한국 사회에서 정초는 단순한 달력의 전환이 아니었다.
농경 사회에서 한 해의 시작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날씨는 어떨지, 수확은 가능할지, 가족은 무사할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장 짙게 몰려오는 시점이 바로 정초였다. 이때 음식은 가장 현실적인 기원이었다. 잘 먹고, 무사히 넘기고, 다시 시작하자는 집단적 다짐이 식탁 위에 올랐다.
떡국이 정초 음식의 중심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흰 떡은 깨끗함과 새로움을 상징했고, 길게 뽑은 가래떡은 이어지는 시간과 생명의 연속성을 뜻했다. 이것을 얇게 썰어 끓여 먹는 행위는 시간을 잘게 나누어 삼키는 상징적 의식이었다. 한 그릇을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인식 역시 시간의 흐름을 음식으로 체감하게 하는 문화적 장치였다.
정초 음식에는 먹지 말아야 할 것들도 함께 존재했다.
잡귀를 부른다 하여 피하던 음식, 액운을 상징한다고 여긴 재료들은 식탁에서 배제됐다. 이는 단순한 금기가 아니라 공동체가 합의한 위험 관리 방식이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을지를 정하는 행위 자체가 사회적 질서를 형성했다. 민속학자들은 정초 음식을 ‘시간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집단적 상상력’이라 설명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인간은 의례를 통해 예측 가능한 구조를 만들었다는 해석이다. 반면 사회사적 관점에서는 정초 음식이 계층과 역할을 구분하는 장치였다고 본다. 차례상과 식사 자리는 가족 내 위계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공간이었고, 음식 분배는 질서를 학습하는 과정이었다.
현대적 시선에서는 정초 음식이 공동체 감각을 회복시키는 매개로 읽힌다. 평소에는 각자 흩어져 살아가던 가족들이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시간 위에 서는 경험은 여전히 강력하다. 데이터로 보면 설날에 가장 많이 소비되는 단어는 ‘맛있다’보다 ‘같이’다. 정초 음식의 핵심은 맛이 아니라 동시성에 있다.
한편 일부에서는 이런 전통이 시대착오적이라 말한다. 나이를 음식으로 계산하는 문화, 특정 음식에 복과 액운을 연결하는 사고는 비합리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문화는 언제나 합리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의미를 공유할 수 있을 때, 사회는 안정된다. 정초 음식은 그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해왔다.
정초 음식은 미신이 아니라 사회적 기술이었다.
첫째, 불안을 관리하는 기술이었다.
둘째, 시간을 공동의 개념으로 묶는 장치였다.
셋째, 세대와 역할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교육 수단이었다. 이 모든 기능이 한 그릇의 음식에 응축돼 있었다.
현대 사회가 개인화될수록 이런 상징적 장치는 더 중요해진다. 모두가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는 시대일수록, ‘같은 날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단순한 행위는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힘을 가진다. 정초 음식이 사라질수록 우리는 시간을 혼자서만 감당해야 하는 사회로 이동한다.
물론 형태는 바뀔 수 있다. 떡국이 아니어도 좋고, 방식이 달라도 된다. 중요한 것은 정초라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는 구조다.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과거를 복제하는 일이 아니라, 기능을 이해하고 현재에 맞게 재배치하는 일이다.
정초에 먹는 음식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각자의 시간 속에 흩어져 있는가.
새해 첫 끼니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미신이라며 웃어넘기기엔, 이 식탁은 너무 오래 사회를 지탱해왔다.올해 정초, 무엇을 먹을지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다. 누구와, 어떤 의미로 먹을 것인가다. 정초 음식은 여전히 우리에게 선택지를 남겨두고 있다.
의미 없는 관습으로 버릴 것인가, 새롭게 해석해 이어갈 것인가. 선택은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몫이다. 더 많은 한국 음식 문화와 생활 속 인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관련 문화 아카이브나 국립민속박물관 자료를 함께 살펴보길 권한다. 정초의 식탁은 끝났지만, 질문은 이제 시작이다.
정초 음식 레시피 3가지
정초에 자주 먹어온 대표적인 음식 가운데, 집에서 부담 없이 만들 수 있는 레시피 3가지를 정리했다. 모두 설 명절과 새해 첫 식탁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음식이다.
1. 기본에 충실한 정초 떡국
재료(2인분)
가래떡 300g, 소고기 양지 120g, 물 6컵, 국간장 1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참기름 약간, 달걀 1개, 김 약간, 소금
만드는 법
먼저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소고기를 볶아 고기의 겉면이 익으면 물을 붓고 중불에서 끓인다.
국물이 우러나면 국간장과 마늘을 넣어 간을 맞춘다.
떡은 찬물에 한 번 헹군 뒤 국물에 넣고 떡이 떠오를 때까지 끓인다.
마지막으로 풀어 둔 달걀을 천천히 넣고 한소끔 더 끓인다.
그릇에 담아 김가루를 올리면 담백한 정초 떡국이 완성된다.
하얀 국물 위로 떠오르는 떡 한 조각은, 지나간 시간을 조용히 덮고 새 시간을 맞이하겠다는 마음 같다. 숟가락을 들어 올릴 때마다 지난해의 무게는 가라앉고, 아직 쓰이지 않은 하루들이 국물처럼 맑게 퍼진다. 떡국은 배를 채우기보다 마음의 나이를 한 살 더하게 하는 음식이다.
2. 삼색 나물 무침
재료(각각 한 접시 분량)
시금치 1단, 도라지 120g, 고사리 120g
국간장, 다진 마늘, 참기름, 깨 약간씩
만드는 법
시금치는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데친 뒤 찬물에 헹궈 물기를 짠다. 도라지는 쓴맛을 빼고 데친다.
고사리는 미리 불려 부드럽게 삶는다. 각각 국간장, 마늘, 참기름으로 따로 무친다.
색이 섞이지 않도록 따로 담아 상에 올리면 정초 상차림에 잘 어울린다.
시금치의 푸름, 도라지의 희고 쌉쌀함, 고사리의 깊은 갈색은 한 해의 표정을 닮아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빠짐없이 식탁에 오르는 이 나물들은, 삶이란 늘 이런 균형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말없이 가르친다. 삼색 나물은 새해에도 담담히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다.
3. 집에서 끓이는 전통 식혜
재료(약 1.5L)
엿기름 가루 1컵, 물 8컵, 밥 1공기, 설탕 4~5큰술
만드는 법
엿기름 가루를 물에 풀어 1시간 정도 두었다가 윗물만 체에 걸러 냄비에 담는다.
여기에 밥을 넣고 약 60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며 4~5시간 둔다. 밥알이 떠오르면 체로 건져내고,
국물에 설탕을 넣어 끓인다. 한소끔 끓인 뒤 식혀 냉장 보관하면 깔끔한 식혜가 된다.
식혜 한 모금에는 기다림의 시간이 스며 있다.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달아오른 단맛은 새해가 우리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 같다. 모든 시작이 꼭 긴장일 필요는 없다는 것, 달콤함은 때로 가장 조용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식혜는 알고 있다.
정초 음식은 복잡한 조리보다 정성과 의미가 먼저다. 새해 첫 식탁에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올려도 충분히 ‘정초다운’ 상이 된다. 올해는 어떤 음식으로 새해를 시작할지, 오늘 미리 정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