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저씨, 저 만 14살 안 넘었는데요? 어차피 감옥 안 가잖아요.” 조사실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다리를 꼬며 뱉는 그 한마디. 35년 경찰 생활을 하며 수많은 범죄자를 만났지만, 그 순간만큼 피가 거꾸로 솟는 때도 드물다.
눈앞의 아이는 친구를 때려 전치 4주 상해를 입히고도 태연하다. 자신이 ‘촉법소년’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법이 자신을 보호해 주는 방패라는 걸 악용하는 아이들, 그들에게 법은 정의가 아니라 ‘치트키’일 뿐이다.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사람을 죽여도, 끔찍한 성범죄를 저질러도 “어리다”는 이유로 형사 처벌을 면하고 보호 처분만 받는다. 소년원 좀 다녀오면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에 피해자와 유족들은 가슴을 친다.
오죽하면 정부가 촉법소년 상한 연령을 만 14세에서 13세로 낮추겠다고 나섰겠는가. 현장에서 뛰었던 나로서도 이 방향성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신체적, 정신적 성숙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빨라진 요즘 아이들에게 1953년에 만들어진 법 잣대를 들이대는 건 넌센스다.
스마트폰으로 온갖 범죄 수법을 학습하는 시대다. 형님들이 처벌을 피하려고 촉법소년인 동생들에게 범죄를 사주하는 ‘범죄 하청’까지 벌어진다. 이런 현실에서 나이 기준을 고수하는 건, 범죄자 양성소에 거름을 주는 꼴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무턱대고 감옥에 보내는 것만이 정답일까. 여기서 35년 베테랑의 고민이 깊어진다. 강력 처벌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만능열쇠는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소년원은 때론 ‘범죄 사관학교’가 되기도 한다. 단순 절도로 들어갔던 아이가 그 안에서 더 지능적인 범죄 수법을 배워 나와서 사기꾼이 되고 조폭이 된다. 교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감옥행은, 그저 사회에 대한 적개심만 키운 괴물을 다시 풀어놓는 시한폭탄 돌리기일 수 있다.
피해자의 인권은 어디에 있는가. 가해자가 소년부 재판을 받으면 기록이 남지 않고,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피해자는 알 길이 없다. 가해자는 “재수 없어서 걸렸다”며 웃고 나오는데, 피해자는 평생 트라우마 속에 숨어 살아야 한다. 이게 과연 정의로운가.
결국 ‘처벌의 확실성’과 ‘교화의 실효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 흉악 범죄에 대해서는 나이를 불문하고 엄벌에 처해 “죄짓고는 못 산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줘야 한다. 동시에 보호 처분의 내실을 다져, 아이들이 범죄의 늪에서 빠져나올 진짜 사다리를 놓아줘야 한다.
진짜 어른이라면 아이 탓만 해서는 안 된다. “요즘 애들은 싹수가 노랗다”고 혀를 차기 전에 돌아봐야 한다. 누가 그 아이 손에 스마트폰을 쥐여주고 방치했는가. 누가 성적만 좋으면 인성은 상관없다고 가르쳤는가.
가정의 붕괴, 학교의 방관, 사회의 무관심이 만들어낸 합작품이 바로 지금의 촉법소년 문제다.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다. 거울 속 아이가 괴물처럼 보인다면, 그건 우리 사회가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법을 고치는 것과 동시에, 우리 어른들의 양심도 수선해야 할 때다.
칼럼니스트 소개

전준석 칼럼니스트는 경찰학 박사이자 35년간의 경찰 생활을 총경으로 마무리한 치안 행정 전문가다. 현재 한국인권성장진흥원 대표로서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데 헌신하고 있다. 인사혁신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등 주요 기관에서 전문 강사로 활동하며 성인지 감수성, 폭력 예방, 리더십 코칭, 생명 존중 및 장애인 인식 개선 등 폭넓은 주제로 사회적 가치를 전파하는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범죄심리학’, ‘다시 태어나도 경찰’, ‘그대 사랑처럼, 그대 향기처럼’, ‘4월 어느 멋진 날에’ 등이 있다. 경찰관으로 35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사람이 인권 침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문제가 있음을 몸소 깨달았다. 우리 국민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차별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인권이 성장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삼시세끼 인권, 전준석 칼럼]을 연재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