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후 2시, 나른한 햇살이 교실 창가를 비추던 평범한 수업 시간이었다. 교탁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평소라면 무시했을 사소한 알림이었으나, 그날따라 화면에 뜬 미리보기 메시지는 내 심장을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낯선 계정이 보낸 사진 한 장, 그것은 내 얼굴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얼굴만 오려내어 입에 담기도 힘든 적나라한 나체 사진에 정교하게 합성한 조악하고도 끔찍한 이미지였다.
순간 교실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칠판을 향해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는 아이들, 맨 앞줄에서 열심히 필기하는 반장, 뒤에서 친구와 장난치는 개구쟁이들. 이 30명의 아이 중 누군가가 지금 내 알몸 사진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존경받는 선생님일 수 없었다. 범죄의 타깃이 된 피해자였고, 발가벗겨진 채 광장에 내동댕이쳐진 수치스러운 한 인간일 뿐이었다.
이것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발표한 딥페이크 성범죄 집중 단속 기간 중 피해를 호소하며 교단을 떠난 어느 교사의 실제 진술을 재구성한 것이다. 35년간 치안 현장을 누비며 산전수전 다 겪은 나조차도 이토록 잔인한 ‘교실 내 사냥’ 앞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단순히 사진 한 장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갉아먹고, 한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명백한 살인 행위다.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아이들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이 흉기가 되었을까.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검거한 딥페이크 성범죄 피의자 중 10대 청소년의 비율이 50%를 훌쩍 넘어섰다. 심지어 촉법소년이라 형사 처벌받지 않는 만 14세 미만의 가해자도 수두룩하다. 과거 N번방 사건이 음지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성착취였다면, 지금의 딥페이크 범죄는 학교와 학원이라는 일상 공간에서 ‘놀이’라는 가면을 쓰고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기술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우리의 윤리 의식에 있다. 과거에는 정교한 합성 사진을 만들기 위해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텔레그램 봇이나 인공지능 앱에 사진 한 장만 넣으면 불과 5초 만에 가짜 영상이 만들어진다. 아이들에게 이것은 심각한 범죄가 아니라, 친구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밈(Meme)’ 놀이의 연장선일 뿐이다. 기술은 아이들에게 신무기를 쥐여주었지만, 그 무기를 다룰 윤리라는 안전장치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피해자는 교사뿐만이 아니다. 같은 반 여학생, 심지어 가족의 얼굴까지 합성의 대상이 된다. 피해자는 자신의 얼굴이 어디서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 모른다는 막막한 공포 속에 살아야 한다. “지워주세요”라고 애원해도, 디지털의 바다에 한 번 퍼진 데이터는 영원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절망감이 그들을 짓누른다. 이것이 바로 전문가들이 딥페이크 범죄를 ‘인격적 살인’이라 부르는 이유다. 육체는 살아있으되 영혼은 난도질당한 채 평생을 고통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경찰서 조사실에서 만난 수많은 10대 가해자는 놀라울 정도로 평범했다. 학교 폭력 전과가 있는 문제아가 아니라, 성적도 좋고 교우 관계도 원만한 모범생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들에게 “왜 그랬니?”라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그냥 호기심에요”, “남들도 다 하니까요”, “진짜로 유포할 생각은 없었어요”. 이 말속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 완전히 거세된, 섬뜩한 무감각이 자리 잡고 있다.
디지털 공간은 그들에게 현실이 아니다. 화면 속의 사진은 사람이라기보다 가지고 놀다 버릴 수 있는 ‘데이터 조각’에 불과하다. 모니터 뒤에 숨으면 누구도 나를 찾을 수 없다는 잘못된 확신, 그리고 ‘내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았다’는 비겁한 안도감이 이들을 괴물로 키웠다. 더욱 뼈아픈 것은 “애들이 장난 좀 칠 수 있지”,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잠깐 일탈한 것 아니냐”라며 가해자를 두둔하는 일부 학부모와 관리자들의 안일한 인식이다.
이런 안일한 인식은 피해 교사와 학생들을 두 번 죽인다.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가 열려도 ‘증거 불충분’이나 ‘교화 가능성’을 이유로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결국 피해자는 견디다 못해 학교를 떠나고, 가해자는 버젓이 졸업장을 받는 기이한 모순이 반복된다. 가해자의 인권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면서, 정작 피해자의 짓밟힌 인권은 외면하는 이 상황이 과연 정의로운가 묻지 않을 수 없다.
35년 치안 전문가로서 단언컨대, 현재의 법과 시스템으로는 이 범죄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기술은 빛의 속도로 달아나는데, 법은 낡은 달구지를 타고 쫓아가는 형국이다. 지금이라도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강력한 사회적 합의와 제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처벌의 확실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청소년이라서, 초범이라서, 반성문을 써서 감형해 주는 관행은 이제 멈춰야 한다.
딥페이크 성범죄는 단순한 명예훼손이나 모욕이 아닌,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중범죄임을 명확히 각인시켜야 한다. 소지하거나 시청하는 행위만으로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강력한 시그널을 주어야 한다. “잡히면 인생이 끝장난다”는 공포만이, 죄의식 없는 그들의 폭주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브레이크다. 아울러 텔레그램을 비롯한 해외 플랫폼 기업들의 책임을 강화하고, 국제 공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디지털 시민성 교육’의 전면적인 개편이다. 지금의 학교 교육은 코딩 기술을 가르치는 데는 열심이지만, 그 기술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사용할 것인지는 가르치지 않는다. ‘나의 쾌락이 타인의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을 유치원 때부터 뇌리에 박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스마트폰 사용법보다 먼저 배워야 할 것은, 화면 너머에 살아 숨 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법이다.
글을 맺으며, 독자 여러분께, 특히 학부모님들께 불편한 질문을 하나 던지고자 한다. “지금 당신 자녀의 스마트폰 사진첩을 열어볼 자신이 있는가?” 우리는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될까 봐 전전긍긍하지만, 내 아이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애써 외면한다. 하지만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절반은 10대다. 방문을 닫고 들어간 내 아이의 방, 그 적막한 공기 속에서 누군가의 영혼이 난도질당하고 있을지 모른다.
학교를 떠난 그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무서워서 더 이상 칠판 앞에 설 수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우리 교육의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 스승이 제자를 두려워하고, 친구가 친구를 의심하는 교실에서 배움은 존재할 수 없다. 이제 멈춰야 한다. “이건 내 얘기잖아”라고 느끼는 순간, 행동해야 한다. 내 아이에게 “이건 범죄야”라고 단호하게 말해줄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
피해자의 고통에 함께 분노하고 연대할 수 있는 사회만이 이 디지털 지옥도를 끝낼 수 있다. 인권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타인의 존엄을 내 존엄처럼 여기는 그 마음, 바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칼럼니스트 소개

전준석 칼럼니스트는 경찰학 박사이자 35년간의 경찰 생활을 총경으로 마무리한 치안 행정 전문가다. 현재 한국인권성장진흥원 대표로서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데 헌신하고 있다. 인사혁신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등 주요 기관에서 전문 강사로 활동하며 성인지 감수성, 폭력 예방, 리더십 코칭, 생명 존중 및 장애인 인식 개선 등 폭넓은 주제로 사회적 가치를 전파하는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범죄심리학’, ‘다시 태어나도 경찰’, ‘그대 사랑처럼, 그대 향기처럼’, ‘4월 어느 멋진 날에’ 등이 있다. 경찰관으로 35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사람이 인권 침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문제가 있음을 몸소 깨달았다. 우리 국민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차별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인권이 성장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삼시세끼 인권, 전준석 칼럼]을 연재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