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자들이 말한 ‘관계의 용기’ — 타인을 향한 시선
“소외된 마음을 바라보는 일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존재를 존중하는 철학적 실천이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용기란 두려움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두려움 속에서도 옳은 일을 선택하는 것”이라 했다.
이 고전적 정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두려움을 없애려 애쓰지만, 철학은 오히려 두려움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두려움은 인간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를 드러내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두려움의 형태는 달라졌다. 그것은 물리적 위협이 아니라 관계의 불안과 정체성의 흔들림으로 나타난다.
“다른 사람에게 거절당할까 봐 두렵다”, “내가 속할 곳이 없을까 불안하다.”
이런 감정들은 사회적 소외의 근원이 되며, 많은 사람을 고립시킨다.
결국 오늘날 필요한 용기는, 세상을 정복하는 영웅적 용기가 아니라 ‘타인과 마주할 용기’, 즉 불편함과 다름 속으로 들어가는 실존적 결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진짜 용기는 위험이 없는 평온한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위험과 불안을 인식하면서도 옳은 방향을 택하는 인간의 의식적 선택에서 비롯된다.
그 선택이 향하는 곳이 바로 ‘타인’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철학은 관계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인간 존재를 “나-너(I–Thou)”의 관계로 규정했다. 그는 인간을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타인과의 대화적 관계 속에서만 완성되는 존재로 보았다.
‘나’는 ‘너’를 마주함으로써만 존재를 확증받는다. 즉,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곧 인간의 존재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부버는 『나와 너』에서 인간이 타인을 단순한 ‘그것(it)’으로 대할 때, 세상은 대상의 세계로 전락한다고 경고했다. 반면, 타인을 ‘너’로 마주하는 순간, 관계는 존재론적 상호성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그에게 있어 ‘관계의 용기’란 타인을 판단하거나 이용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결단이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공감이 아니라, 존재론적 존중(Ontological respect)의 실천이다.
현대 사회는 효율과 생산성을 앞세우며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구조를 정당화한다.
누군가가 고립되어 있어도, 그것은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진다. 그러나 철학은 이때 묻는다.
“인간은 타인을 외면할 자유가 있는가?”
부버의 대답은 단호하다. 타인을 외면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 안의 ‘너’를 잃는다. 타자를 객체화하는 행위는 곧 자기 존재를 대상화하는 것이며, 그 순간 소외는 심화된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진정한 용기란 두려움 속에서도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 했다.
그에게 용기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자기 초월(self-transcendence)의 행위였다.
타인을 향한 시선은 자신이 쌓아온 신념과 방어벽을 넘어서는 일이며, 그곳에서 인간은 비로소 윤리적 주체로 선다.
즉, 관계의 용기란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존재의 균형 위에 선 실존적 결단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소외된 사람을 바라보는 행위’를 단순한 선행이나 동정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는 근원적 실천이다.
타인을 바라본다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함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순간, 인간은 고립된 개인에서 함께 존재하는 존재(homo dialogicus)로 변모한다.
결국 철학이 말하는 관계의 용기는, 타인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그 곁에 머무르는 능력이다.
그것은 ‘무관심의 철학’에 맞서는 윤리적 저항이며,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공존의 감각을 되살리는 실존적 태도다.
오늘날 우리는 기술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정서적으로는 어느 때보다 고립되어 있다.
SNS의 수많은 대화는 관계의 환상만을 남기고, 깊은 교감은 사라졌다.
이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소통이 아니라, 더 깊은 이해의 철학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은 생각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고 했다.
이 말은 단순히 윤리적 경고가 아니다. 그것은 ‘무관심의 철학’을 향한 비판이다.
‘관계의 용기’는 곧 사유의 용기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나는 어떤 인간인가”를 묻는 철학적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다.
공감은 감정이 아니라, 사유의 결과이며 윤리적 선택이다.
우리가 철학을 통해 타인을 바라볼 때, 그 시선은 단순한 이해를 넘어 존재의 연대로 확장된다.
사회는 언제나 약자를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철학은 그 반대의 길을 제시한다.
부버가 말한 ‘너’의 세계, 키르케고르가 강조한 ‘자기 초월의 용기’는 결국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복원하는 길이다.
이것이 철학이 말하는 진짜 용기다.
‘소외된 마음을 바라보는 용기’는 오늘날 가장 절실한 철학적 덕목이다.
용기란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힘이 아니라, 타인의 눈빛을 피하지 않는 태도다.
부버는 말한다. “모든 진정한 삶은 만남이다.”
그 만남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발견하고, 타인을 통해 인간다움을 배운다.
결국 철학이 말하는 용기의 본질은 ‘나’를 지키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너’를 통해 ‘우리’를 회복하려는 사유의 행위다.
오늘날 철학은 묻는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타인의 고통을 깊이 바라본 적이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멈추지 않고 시선을 유지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철학자가 된다.
그것이 철학적 용기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용기만이, 소외된 사회를 다시 ‘관계의 세계’로 이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