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나는 국가와 무관한 사람이 되었을까”
공직에서 물러나는 순간, 많은 이들이 비슷한 질문 앞에 선다. 더 이상 직함도, 결재 권한도, 공적인 명함도 없을 때 나는 여전히 국가와 연결된 존재일까. 혹은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에서 조용히 밀려난 한 개인일까. 은퇴는 흔히 자유의 시작으로 묘사되지만, 공직을 수행해 온 사람에게 은퇴는 단순한 해방이 아니라 정체성의 공백으로 다가온다. 매일 아침 출근하며 국가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던 시간이 끝난 뒤, 삶은 갑자기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인문학의 시선에서 보면 은퇴는 단절이 아니라 전환에 가깝다. 국가는 제도이자 조직이지만 동시에 관계의 총합이다. 공직자는 그 관계 속에서 역할을 수행해 왔고, 은퇴 이후에도 그 관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이제 나는 어떤 방식으로 국가와 연결되어 있을 것인가. 권한을 가진 주체에서 책임을 성찰하는 시민으로 이동하는 이 과정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공성을 가늠하는 척도다.
공직의 끝에서 다시 만나는 시민
근대국가에서 공직은 시민성과 분리되지 않았다. 공직자는 시민 중에서 선발된 존재였고,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만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공직이 하나의 직업 정체성으로 굳어지며 발생했다. 오랜 기간 조직 문화와 권한 구조 속에 머문 사람일수록 은퇴 이후 시민으로의 복귀는 쉽지 않다. 이는 개인의 적응 문제를 넘어, 사회가 은퇴자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로 확장된다.
한국 사회는 특히 이 지점에서 긴장 상태에 있다. 공직 이후의 삶은 지나치게 두 가지 이미지로만 소비돼 왔다. 하나는 조용히 사라지는 은둔형 은퇴자이고, 다른 하나는 영향력을 사적 영역으로 이전해 논란의 중심에 서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이분법은 공직 이후의 시민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시민은 은둔하거나 영향력을 남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공공의 문제에 참여하는 주체다. 은퇴 이후에도 사회적 경험과 판단 능력을 공공 영역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히 존재한다.
공공성은 제도 밖에서도 작동한다
정치철학은 오래전부터 공공성을 권력과 분리해 사유해 왔다. 한나 아렌트는 공적 영역을 타인과 함께 말하고 행동하는 공간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공직 여부는 공공성의 조건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타인과 세계를 공유하려는 태도다. 은퇴 이후에도 토론회에 참여하고, 시민 교육에 기여하며, 지역 공동체에서 경험을 나누는 행위는 모두 공적 행위다.
또 다른 관점에서 마이클 샌델은 시민적 덕목을 공동선에 대한 관심으로 설명한다. 공동선은 선출직이나 고위 공직자만 다루는 대상이 아니다. 복지, 환경, 세대 갈등 같은 문제는 오히려 삶의 경험이 축적된 은퇴자에게 더 깊은 통찰을 요구한다. 공직 이후의 시민성은 권한의 연장이 아니라 덕목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은퇴 이후의 공공성은 사회적 자산이다
공직 경험은 단순한 경력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이다. 정책 결정의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 제도의 한계를 체감한 경험, 공적 판단의 무게를 아는 감각은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 자산이 사적으로만 소비될 때 발생한다. 반대로 시민사회와 지역 공동체, 공론장으로 환원될 때 사회 전체의 신뢰 자본을 높인다.
은퇴 이후의 공공성을 제도화할 필요도 있다. 멘토링, 공공 교육, 시민 자문 같은 장치는 은퇴자를 다시 공공 영역으로 초대하는 통로가 된다. 이는 개인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동시에, 사회가 공직 경험을 존중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계약으로만 유지되지 않는다. 신뢰와 기억, 책임의 연속성으로 유지된다. 은퇴는 이 연속성을 끊는 순간이 아니라 다른 형식으로 이어 붙이는 지점이다.

국가는 떠나는 대상이 아니라 다시 배우는 관계다
은퇴 이후에도 국가는 우리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얼굴이 달라질 뿐이다. 명령하고 집행하던 국가에서 질문하고 토론해야 할 대상으로 바뀐다. 이 전환을 받아들일 때, 공직자의 은퇴는 개인의 퇴장이 아니라 사회의 확장이 된다. 국가를 떠난 사람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국가에 남는 사람들. 이들이 많아질수록 공공성은 제도 바깥에서도 살아 움직인다.
독자에게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은퇴자를 과거의 사람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스스로 은퇴 이후의 시민성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공직 이후의 삶은 조용히 사라지는 시간이 아니라, 국가와의 관계를 다시 쓰는 시간이다. 그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