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의, 인애, 겸손 — 하나님이 원하신 진짜 예배의 본질
선지자 미가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법정 같은 장면을 그려낸다. 하나님이 원고로, 이스라엘이 피고로 서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미 6:1). 하나님은 산과 언덕, 땅의 기초를 증인으로 불러 세우며, 자기 백성과 변론하신다.
하나님은 묻는다. “내가 너를 괴롭힌 것이 무엇이냐?” (6:3) 그리고 이스라엘의 과거를 상기시킨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은혜, 모세와 아론, 미리암을 세워 인도하신 사랑, 그리고 발락과 발람 사건 속에서도 지켜주신 신실함.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은혜를 잊고 불의와 탐욕, 형식적 신앙에 빠졌다.
이 장면은 오늘 우리에게도 거울이 된다. 풍요와 종교적 행위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지는 않는가? ‘믿음의 송사’는 시대를 초월해 이어진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내가 너를 괴롭힌 것이 무엇이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질책 앞에서 반문한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일 년 된 송아지를 드릴까?” (6:6) 그들은 더 많은 제사, 더 화려한 제물, 심지어 “내 몸의 열매를 내 영혼의 죄로 인하여 드릴까?”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자신들의 죄를 값비싼 제물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한 종교적 착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의 양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다. 그분은 외적인 헌신보다 내면의 진실을, 종교적 의식보다 공의와 인애의 실천을 바라신다.
오늘날도 신앙의 위기는 ‘예배를 드리는가’가 아니라 ‘예배답게 사는가’의 문제다. 찬양과 기도가 넘치는 교회라도, 사회 속에서 정의와 사랑이 사라진다면 그 예배는 공허하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애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6:8)
이 말씀은 선지자 미가서 전체의 핵심이자, 신앙의 본질을 압축한 선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은 세 가지 축으로 요약된다.
첫째, 공의(Justice) — 사회적 정의와 도덕적 정직함을 실천하는 삶이다. 불의한 구조와 탐욕을 묵인하지 않는 용기, 그것이 공의다.
둘째, 인애(Mercy) — 히브리어 ‘헤세드’(חסד)는 변치 않는 사랑과 신실한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충성스러운 사랑이다.
셋째, 겸손(Humility) — 자기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태도다. 겸손은 단순한 낮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순종의 자세다.
이 세 가지는 분리될 수 없다. 공의 없는 인애는 감정이고, 인애 없는 공의는 냉정하다. 겸손 없는 정의는 교만으로 흐른다. 이 삼중주는 ‘하나님 나라의 조율된 신앙’이다.
미가 6장은 종교의 형식화, 신앙의 타락, 사회적 불의를 향한 하나님의 고발이다. 그러나 동시에 회복의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공의, 인애, 겸손”으로 표현된 삶의 예배다.
오늘의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기술로 가득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마음을 잃고 있다. 예배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관계, 형식이 아니라 실천이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찬양보다 정의를, 봉헌보다 사랑을 기뻐하신다.
따라서 신앙은 매주 예배당에서 시작해 월요일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회사에서의 정직, 가정에서의 인내, 사회 속에서의 공의 실천이 바로 예배의 연장이다.
하나님이 원하신 진짜 예배자는 ‘공의롭게 행동하고, 인애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다.
미가 6장의 하나님은 멀리 계신 재판장이 아니라, 잃어버린 백성을 애타게 부르시는 아버지였다.
그분이 원하신 것은 값비싼 제물이 아니라, 공의로운 행동, 사랑의 관계, 겸손한 동행이었다.
오늘의 신앙이 이 세 가지를 잃어버렸다면, 예배는 이미 껍데기다.
“공의와 인애와 겸손” — 이 세 단어가 우리의 믿음을 다시 세우는 기둥이 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