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배, 나 지금 너무 눈물이 나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 나 계속 눈물이 나 ."흑 흑 소리
2025년 12월, 연말 분위기 속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후배의 고백은 당혹스러웠다.
평소 냉철하고 이성적인 친구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를 이토록 무너뜨린 주범은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SF 재난 영화 <대홍수>였다.
소행성 충돌로 지구를 덮친 대홍수 속에서 AI 연구원 구안나(김다미 분)가 아들과 함께 침수된 아파트에서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
어찌 보면 전형적인 재난 블록버스터의 설정을 가진 이 영화를 보고 건장한 성인이 대성통곡을 했다는 사실이 선뜻 믿기지 않았다.
그는 마치 최면 상태에서 연령퇴행을 겪은 사람처럼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파트 2~3층 높이까지 물이 차오르고 고립되는 스펙터클한 영상 속에서, 문득 어린 시절 텅 빈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느꼈던 그 지독하고 원초적인 공포가 몸서리치게 되살아났다고.
엄마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봐,
나만 홀로 두고 세상이 끝나버릴까 봐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서너 살의 '어린 나'를 영화 속 침수된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정면으로 마주한 셈이다.
지금 화제작인 영화 <대홍수>를 둘러싼 반응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다.
300억 정도라는 막대한 제작비와 블록버스터급 스케일로 공개 전부터 기대를 모았지만,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참혹한 수준의 혹평이다. 평점은 최저점과 최고점으로 극명하게 갈렸고,
온라인에서는 "올해 최악의 망작", "명쾌한 메시지와 철학이 사라진 SF의 비극"이라는 날 선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재난 영화로 시작했다가 중반부터 신인류를 위한 AI '이모션 엔진' 개발이라는 SF로 급선회하는 전개는 많은 시청자를 당혹게 했다. 개연성 부족은 물론이고, 극 중 여섯 살 아들 자인(권은성 분)이 위급한 상황에서 화장실을 찾거나 사라지는 행동을 반복하며 몰입을 방해하는 '빌런' 취급을 받기도 한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보며 장르의 부조화와 엉성한 이음새에 고개를 갸웃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흥행 지표는 딴판이다.
넷플릭스 공식 ‘Top 10(튜둠)’ 집계에서 <대홍수>는 비영어 영화 부문 글로벌 1위, 주간 27.9M(2,790만) views로 표기돼 있다.
비평의 처참한 실패와 글로벌 대중의 뜨거운 선택, 이 기묘한 괴리 속에서 후배의 눈물은 그 어떤 평론보다 강렬한 물음표를 던진다.
<대홍수>를 둘러싼 담론은 뜨겁다.
홍수정 영화평론가는 한 매체를 통해 "최근 관객들은 빈틈없이 맞물리는 스토리와 서사적 완결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대홍수>는 이야기 전개가 성기고 거칠어 호불호가 갈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사적 완결성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300억짜리 '한국 영화 기획의 퇴보'를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넷플릭스라는 거대 자본 시스템이 창작자의 해이를 불러왔다는 비판도 뼈아프다.
하지만 후배의 반응은 이러한 이성적 비평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에게 이 영화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무의식 깊은 곳에 잠겨 있던 '감정의 배아'를 건드리는 뜨거운 이미지의 집합체였다.
평론가들과 대중이 '민폐 캐릭터'라고 비난했던 아이의 칭얼거림과 돌발 행동은, 누군가에게는 잊고 있었던 자기 자신의 가장 연약했던 시절의 비명으로 다가왔다.
논리적인 '머리'가 아닌 '심장'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이는 서사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영화가 제공하는 특정 이미지가 개인의 경험과 결합했을 때 발생하는 폭발적인 정서적 화학작용이다.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영화의 조건으로 탄탄한 개연성, 설득력 있는 메시지, 배우들의 호연을 꼽는다.
하지만 때로는 그 모든 이성적인 잣대를 뛰어넘는 순간이 찾아온다.
영화 속의 특정 장면이나 설정, 심지어 결함이라고 여겨지는 서사의 빈틈들이 관객 개인의 고유한 경험, 특히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트라우마와 맞닿을 때 영화는 스크린을 넘어 개인의 삶 속으로 침투한다.
후배에게는 물에 잠겨가는 폐쇄된 아파트가 곧 어린 시절 불안에 떨던 자신의 내면 공간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엉성한 구조 사이로 관객 각자의 내면에 고여 있던 거대한 슬픔의 둑을 터뜨리는 강력한 '정서적 촉매제' 역할을 수행했다.
극 중 연구원들은 AI에게 감정을 학습시키는 '이모션 엔진' 구현에 골몰하지만, 정작 영화는 관객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거대한 엔진으로 작동한 셈이다.
"이제는 어른이 된 네가, 그때 겁에 질려 있던 어린 너를 찾아가서 꼭 안아줘라.
이제는 내가 너를 보호할 힘이 있다고, 괜찮다고 말해줘라."
언제나 치료현장에서 하는 것 처럼 위의 말을 해주라고 하니 후배는 전화기 너머로 한참을 더 울었다.
그것은 단순한 슬픔의 표현이 아니라, 수십 년간 억눌려왔던 감정이 해독되는 과정이었다.
아무리 전문가들이 혹평하고 서사가 난해한 작품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어떤 파편이 단 한 사람의 관객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그 영화는 그것으로 자신의 소명을 다한 것이다.
영화관, 혹은 넷플릭스가 켜진 어두운 방은 각자의 가장 내밀한 기억과 독대하는 거대한 심리 치료실이기도 하다.
2025년의 끝자락에서 만난 <대홍수>는 우리에게 영화를 본다는 행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고, 별점 몇 개로 작품의 가치를 재단하려 든다.
하지만 세상이 모두 실패작이라 손가락질하는 영화 속에서 나만의 보물을 발견하는 경험이야말로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역설적인 선물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각자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학습하고, 자신만의 속도로 과거의 상처라는 홍수에서 헤엄쳐 나오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이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아이를 향한 사랑이었듯,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련된 비평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낡은 상처를 직면하고 보듬어줄 용기일 것이다.
당신을 대성통곡하게 만드는 영화는 무엇인가? 그것이 비록 평점 1점짜리 난해한 영화일지라도, 당신의 영혼을 건드렸다면 그것은 당신에게만큼은 '올해의 영화'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제 생각을 이야기 한다면
영화 비평은 객관성을 지향하지만, 가장 위대한 비평은 언제나 가장 주관적인 고백에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선 영화 <대홍수>를 보며 울음을 터뜨린 제 후배의 경험은 이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를 보여줍니다. 비록 서사가 난잡하고 '철학의 부재'라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한 인간의 깊은 무의식을 건드려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게 만들었다면 그 영화는 예술로서의 제 역할을 다한 셈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물에 잠긴 채 구조를 기다리는 '아파트 303호의 아이'가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은 감독의 연출력이 아니라, 영화를 매개로 용기를 낸 관객 자신의 몫입니다.
이번 연휴에는, 남들의 평가는 잠시 접어두고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자아내는 영화나 책을 외면하지 말고 마주해 보세요. 그 난해하고 불편한 이야기가 당신 내면의 어떤 기억을 건드리고 있는지 조용히 응시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권합니다. 뜻밖의 치유는 그렇게 예기치 않은 이야기 속에서, 가장 사적인 방식으로 시작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