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상은 왜 아이의 놀이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가
아이가 하루 종일 인형에게 말을 걸고, 보이지 않는 친구와 대화하며, “이건 진짜가 아니라 설정이야”라고 말할 때 어른의 마음은 흔들린다. 상상력이 풍부한 건지, 현실 감각이 부족한 건지 판단이 쉽지 않다. 어떤 어른은 “창의적인 아이다”라고 말하고, 또 다른 어른은 “현실을 피하는 것 같다”고 걱정한다. 상상놀이는 늘 이렇게 두 얼굴을 가진다.
한쪽에서는 창의성과 사고 확장의 증거로 환영받고, 다른 쪽에서는 현실 회피의 신호로 의심받는다. 문제는 상상놀이 그 자체가 아니라, 상상이 아이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에 있다. 상상은 아이를 세상으로 데려올 수도 있고, 세상에서 숨게 할 수도 있다. 이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면, 어른은 불필요한 걱정을 하거나 꼭 필요한 개입을 놓치게 된다. 상상놀이를 발달의 언어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환상은 창의력이 될 수도, 방어가 될 수도 있다
발달심리학에서 상상놀이는 사고 발달의 핵심 단계로 여겨져 왔다. 아이는 상상을 통해 눈앞에 없는 것을 떠올리고, 역할을 바꾸며, 타인의 관점을 연습한다. 이는 언어, 사회성, 문제 해결 능력의 토대가 된다. 세계적 연구들은 상상놀이가 풍부한 아이일수록 이야기 구성 능력과 정서 이해력이 높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동시에 연구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함께 말한다.
상상이 언제나 건강한 방향으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상상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잠시 밀어내는 방패가 되기도 한다. 이때 상상은 확장이 아니라 회피의 기능을 한다. 발달적 관점에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아이가 상상을 통해 현실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현실과의 접촉을 줄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놀이의 내용보다 놀이의 사용 방식을 봐야 한다.
발달적 상상놀이와 위험 신호의 결정적 차이
건강한 상상놀이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진다. 먼저 상상과 현실을 오갈 수 있다. 놀이 중간에 어른의 말에 반응하고, 상황 변화에 맞춰 이야기를 조정한다. 상상 속 인물과 현실의 자신을 구분할 줄 안다. 또한 상상놀이는 확장된다. 처음에는 단순한 설정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역할이 늘고 갈등이 생기고 해결이 시도된다. 아이는 상상 안에서 문제를 만들고, 다시 풀어본다. 이는 사고 실험의 과정이다.
반면 주의 깊게 봐야 할 환상 사용은 양상이 다르다. 상상이 지나치게 반복되고, 이야기의 결말이 없으며, 외부 자극에 쉽게 끊긴다. 놀이가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장면을 맴돈다. 이때 환상은 창의적 확장이 아니라 정서적 고착의 역할을 한다. 세계적 놀이 연구들은 이런 환상 사용이 불안, 상실 경험, 사회적 위축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아이는 상상 속에서만 통제감을 느끼고, 현실에서는 점점 물러난다.
아이가 현실을 떠나는 순간을 알아채는 법
창의성과 현실 회피를 가르는 기준은 상상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핵심은 상상이 아이를 어디로 데려가느냐다. 첫째, 상상 후 아이의 상태를 본다. 놀이를 마친 뒤 아이가 편안해지고, 다시 현실 활동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상상은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놀이가 끝나도 아이가 멍해지거나 예민해진다면, 상상은 정서 조절에 실패하고 있다.
둘째, 상상 속 권력 구조를 본다. 건강한 상상놀이는 역할이 바뀌고 힘의 균형이 흔들린다. 반면 위험 신호에 가까울수록 아이는 늘 같은 위치에 머문다. 절대적으로 강하거나, 늘 사라지는 존재가 된다. 셋째, 관계의 확장 여부를 본다. 상상이 또래나 어른과 연결되는가, 아니면 혼자만의 세계로 닫히는가. 상상이 관계를 대체하기 시작하면 개입이 필요하다.
이 기준들은 진단이 아니라 방향 제시다. 아이의 상상을 끊기 위한 기준이 아니라, 상상이 아이를 돕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나침반이다. 아이에게 상상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언어다. 상상놀이는 아이가 세상을 연습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세상에서 숨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 차이는 아주 미묘하지만, 어른의 관찰 앞에서는 분명해진다.
상상을 없애려 하지 말고, 상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묻는 태도가 필요하다. 아이가 상상 속에서만 살아가고 있다면, 그 세계를 부수는 대신 현실로 돌아올 다리를 놓아야 한다. 창의성은 현실을 떠나는 힘이 아니라, 현실을 다시 바라보는 힘이다. 아이의 상상이 그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 우리는 충분히 보고 있는가.
상상놀이를 키운다는 것은 아이를 비현실적으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견딜 수 있는 내적 공간을 키우는 일이다. 다만 그 공간이 아이를 고립시키지 않도록, 어른의 눈은 늘 열려 있어야 한다. 아이의 상상놀이가 궁금해졌다면, 오늘은 놀이를 평가하지 말고 기록해 보기를 권한다. 무엇을 상상하는지보다, 상상 후 아이가 어떤 상태로 돌아오는지를 지켜보라. 그 안에 중요한 힌트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