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은 거리 때문에 죽는다’고 독일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1899-1974)는 말했다. 국경, 종교, 인종, 남과 여성의 경계는 물론 사람과 동식물 사이까지 넘어서는 사랑이 예부터 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야말로 다반사가 되고 있다.
우리 남북 이산가족을 비롯해서 자녀교육이나 직장 관계로 기러기 가족도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영어를 배우다가 그 뜻이 상반되는 두 가지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고민했다. 어느 말이 맞는지 몰라서. 하나는 ‘눈에서 벌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또 하나는 ‘떨어질수록 더 그리워진다. 둘 다 맞는 말일 텐데 어느 말이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지 알 수 없어 오랜 고심 끝에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주로 상대의 하반신을 좋아할 때는 전자가, 상반신을 사랑할 때는 후자일 것이라고. 왜냐하면 남자 건 여자 건 남자는 남자 대로 여자는 여자 대로 하반신 구조는 각각 다 비슷하지 않은가. 말하자면 하반신은 대체가 가능하겠지만 상반신의 경우 불가능할 테니까. 사람은 얼굴 생김새부터 다 다르고 그 사람의 인격과 개성은 전무후무할뿐더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일무이한 까닭에서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 과학섹션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요가와 섹스 스캔들: 놀랄 것 없지 ’란 제목의 기사에서 뉴저지주에 있는 럿거스대학의 과학자들이 어떻게 요가가 자동성애지복감을 촉진 유발시킬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있다면서 어떤 사람들은 생각만으로도 성적 절정의 황홀감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옛날 젊었을 때 일이 생각났다. 그 당시 데이트하던 한 아가씨와 대한극장에 영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보러 갔었다. 이층 로비에서 다음 회 상영시간을 기다리던 중 아가씨가 ‘화장실에 가지 않을래요? 라고 했다. 별로 갈 생각이 없었으나 아가씨가 무안해 할까봐 우리는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신사와 숙녀 화장실 입구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신사 화장실로 들어서 오줌 누는 시늉만 하다가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아가씨와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몇 미터만 공간을 단축시킨다면 아가씨와의 사이에 거리가 없어져 아가씨 몸속에 내 몸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축지법이 아닌 축공법을 그 순간 경험한 것이다. 그 후로 나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아무하고라도 아주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우주 공간을 한 점으로 압축시킨다면 세상 모든 사람과 일심동체가 될 수 있지 않으랴. 여기서 우리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의 뜰’에 나오는 알무스타파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열두 해라고 했나요. 카리마, 나는 내 그리움의 길이를 별들이 움직이는 세월로 가늠해 재보지 않았어요. 사랑이 향수에 젖게 되면 시간의 눈금이 다 녹아 자로 쓸 수 없게 되지요. 영겁을 두고 떨어져 있는 연인들 사이를 맺어주는 영원한 순간이 있나 하면 그리워하는 생각 다함이 이별이란 망각 아닌가요. 우린 헤어진 적 없지요.”
젊은 날 친구의 결혼식에서 주제넘게 주례사가 무색할 사회를 봐 주례선생님을 화나시게 한 일이 있다. 참다운 결혼이란 영혼과 영혼의 결합일 것임으로 결혼식은 두 사람이 이 세상 떠날 때 하기로 하고 우선 두 사람의 육신이 결합하는 ‘결육식’부터 거행한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춘기 소년 시절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미국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의 ‘에반젤린’, 영국의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이녹 아든’, 그리고 저자의 이름은 잊었지만 일본 사람이 쓴 ‘사랑과 인식의 출발’ 등을 탐독했고, 일본에서 있었던 실화로 사형수와 처녀의 순애 일기 ‘사랑과 죽음이 남긴 것’을 너무도 감명 깊게 읽고 그런 결혼관을 갖게 되었었나 보다.
일본의 어떤 살인범이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수로 형 집행을 기다리면서 옥중에서 쓴 그의 수기가 신문에 발표되자 한 여성 독자가 이 사형수를 위로하는 편지도 보내고 그를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결혼까지 하여 법적인 부부가 되나 단 하루도 부부생활은 못해 본 채 부인의 애절한 구명운동도 허사로 끝나 남편은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만다.
나도 이같이 절대적인 사랑을 해보고 싶었고 몇 번의 시행착오도 있었으나 그래도 꿈만 꾸어오다가 다 늦게나마 나 대신 내 아이가 그런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지난 2013년 그동안 제 눈에 드는 남자를 못 만나 싱글로 살아가던 내 둘째 딸이 피부암 말기 환자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자신과 같은 암 환자 기금 모금을 위한 그의 산티아고 순례기 를 인터넷에서 보고 교신해 사귀다가 결혼 후 5개월 만에 사별하게 되었다.
“사랑이 다가오는 순간은 미세한 떨림에서 시작된다. 첫 떨림의 순간이 파장을 일으켜 첫 만남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사랑하니까. 그리고 또 사랑하니까. 영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용혜원의 시 ‘사랑하니까’에서도 사랑의 정의가 나온다. 칼릴 지브란이 ‘예언자의 뜰’에서 말하듯 영겁을 두고 떨어져 있는 연인들 사이를 맺어주는 영원한 순간이 있는가 하면, 그리워하는 생각 다함이 이별이란 망각이라면, 지금의 내 입장은 어떤 것일까. 정녕,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순수성과 영원성 그리고 운명성을 맛보는 것이 아닐까. 한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그 제목은 ‘영원한 사랑’이다. 중국의 한 가극 오페라를 멜로 드라마로 각색해 만들어진 영화로 1960년대 중국 특히 대만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이 영화를 처음 본 이후로 오늘날까지 매번 볼 때마다 눈물을 쏟게 된다. 내가 만드는 영화들은 하나같이 이 ‘영원한 사랑’이 주는 영원한 감동의 진수를 되살려 보려는 것뿐”이라고 ‘와호장룡’의 감독 리안이 언젠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자, 이제 ‘영원한 사랑’ 이야기를 간단히 해보자.
어느 조그만 마을 부유한 집에 태어난 리디는 영리하고 호기심이 많아 공부하고 싶어도 남자애들처럼 학교에 갈 수 없다. 남자들만 학교를 갔었으니까. 궁리 끝에 남자아이로 변장하고 학교에 가겠다고 부모님을 졸라 설득한다. 남자아이들만 있는 기숙학교로 가는 길에 개울가의 석탑에서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는 링포를 만나 금세 친해진다. 그러면서 리디는 링포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둘은 맺어지지 못하고 리디가 다른 사람과 정혼하게 되어 그 사실을 알게 된 링포는 그 소식에 절망해 열병을 앓다 죽는다. 이 비보를 들은 리디는 시집가는 날 링포의 무덤 앞을 지나다가 신부복을 벗어버리고 속에 입고 있던 상복차림으로 죽은 애인을 그리워하며 애절한 사랑 노래를 부른다. 그러자 링포의 무덤이 갈라지고 리디가 그 무덤 속으로 뛰어들면서 합장되어 버린다. 이것이 2002년에 나온 김윤희의 감동적인 장편체험소설 ‘잃어버린 너’라기보다 ‘되찾을 나’가 아닐까.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