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DNA에는 '순례자의 본능'이 새겨져 있다
매년 12월 18일, '세계 이주민의 날'이다. 거창한 날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네 인생 자체가 이주민의 역사다. 인류의 조상이라는 아담과 하와를 보라. 그들은 낙원이라 불리던 에덴에서 짐을 싸서 쫓겨난, 인류 최초의 '이주민'이었다. 그날 이후로 인간에게 이 땅에서 영원하고 '안정된 정착'이란 잡을 수 없는 신기루가 되었다.
성경이라는 두꺼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신을 찾아 떠나는 거대한 순례단의 일지"라고 말하겠다. 구약성경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먼지 낀 샌들과 낡은 배낭을 멘 나그네들이 쏟아져 나온다.
노아는 어떤가? 살던 땅이 물에 잠길 때 거대한 나무 상자 하나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떠돌았던 그는 오늘날로 치면 기후 난민이자 해상 정착민의 원조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이력서는 더 화려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문명 도시이자 '강남'이었던 갈대아 우르를 미련 없이 버렸다. 목적지가 어디냐고? 몰랐다. 그냥 신이 가리키는 손가락 하나 믿고 익숙한 안락함을 걷어찬 채 광야로 나섰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자발적 유랑이었다.
야곱의 식구들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간 건 생존을 위한 경제적 이주였고, 400년 뒤 모세와 함께 국경을 넘은 출애굽 사건은 억압을 피해 자유를 찾아 떠난 거대한 정치적 망명이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텐트를 치고 거두기를 반복하며 배웠다. "아, 우리는 땅에 뿌리박을 존재가 아니라, 하늘을 보고 걸어야 하는 존재구나."
국경을 넘는 메시아, 길 위에서 태어난 복음
신약으로 넘어와도 이 '이주'의 테마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더 비극적이고 숭고해진다.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셨을 때(성육신), 그분을 맞이한 건 따뜻한 안방이 아니라 차가운 구유였다. 태어나자마자 헤롯의 살해 위협을 피해 이집트 국경을 급히 넘어야 했던 그 밤, 아기 예수의 울음소리는 지금도 전쟁과 폭력을 피해 보트를 타는 난민 아이들의 울음과 겹친다. 이렇듯, 예수는 철저한 난민(Refugee)이었다.
이후,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스스로, "머리 둘 곳 없는 노숙자"라고 소개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인자는 길 위가 집이었다. 제자들 역시 복음을 배낭에 넣고 국경과 문화를 넘나드는 '디지털 노마드'가 아닌 '가스펠 노마드(Gospel Nomad)'로 살았다. 베드로가 우리를 향해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부른 건 단순한 문학적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 신분증에 찍힌 정확한 국적이다. 우리는 천국 비자를 들고 이 땅을 잠시 여행하는 체류자들이다.
흥미로운 건,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조차 살해 위협을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야반도주하듯 떠났다는 사실이다. '헤지라'라 불리는 이 사건이 이슬람의 기원이 되었다. 종교를 떠나, 인간이 무언가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익숙한 '고향'을 떠나 낯선 '타향'에서 깨어지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12년의 기다림 대 12살의 급박함: 누가 더 중요한가?
이러한 이주민의 관점에서 누가복음 8장을 읽으면 전율이 온다. 여기 아주 기막힌 드라마가 펼쳐진다. 여기에는 두 여자가 등장한다.
한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다. 나이는 12살,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다. 아버지가 회당장이니 오늘날로 치면, 지역 유지, 아니 국회의원급 권력자의 금지옥엽 외동딸이다.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 응급실 사이렌이 울리는 급박한 상황이다. 그리고, 반대편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이 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피를 흘리는 병은 저주받은 부정한 병이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재산은 의사들에게 다 털리고,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사회적으로 이미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여인이다. 그녀는 마치 불법 체류자처럼 사람들 눈을 피해 숨어 다녀야 했다.
예수님은 지금 회당장의 요청을 받고 그의 집으로 '출동'하는 중이다. VIP 고객을 살리기 위한 골든타임이다. 제자들도, 구경꾼들도 모두 그쪽으로 쏠려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제자들은 미칠 노릇이다. "주여, 밀치고 당기는 사람이 이 복잡한 상황에서 한두 명입니까? 바빠 죽겠는데 무슨 농담을 그리하십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진지했다. 그 북새통 속에서, 짐승처럼 웅크리고 몰래 옷자락만 만지고 도망치려던 그 여인의 가냘픈 '떨림'을 감지한 것이다.
이 장면은 세상의 효율성을 완전히 파괴한다. 유력 인사의 딸을 살리러 가는 길을 멈추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노숙자 같은 여인과 대화를 시도하다니. 결국, 그 지체된 시간 때문에 야이로의 딸은 숨을 거둔다(물론 예수님은 나중에 반전 드라마처럼 그녀를 다시 살리신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의 충격적인 메시지가 드러난다. 예수님의 계산기에는 '중요한 사람'과 '덜 중요한 사람'의 구분이 없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시민권자의 생명이나, 12년 동안 아무런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떠돌던 이주민 같은 여인의 생명이나 똑같은 무게를 가진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 "딸아!"라고 부르신다. 지난 12년 동안 누구도 그녀를 가족으로, 딸로 불러주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즉석에서 발급해 주신 것이다.

낯선 이웃을 향한 우리의 시선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고 선언하며 현대 인권의 기초를 놓았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이 사상의 뿌리는 계몽주의가 아니라 바로 저 성경의 장면들이다. 창조주 앞에서 왕이나 노예나, 자국민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입은 존엄한 존재라는 그 혁명적인 사상 말이다.
지금 우리 곁을 돌아보자. 코리안 드림을 안고 들어온 공장의 외국인 노동자들, 전쟁을 피해 온 난민들, 결혼 이주 여성들. 그들은 언어가 서툴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 사회의 '혈루증 여인'처럼 투명 인간 취급을 받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그들을 환대해야 하는 이유는 도덕 교과서에 나와서가 아니다. 우리 조상들도 한때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하던 이주민이었고, 무엇보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최고위급 이주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길에서 마주치는 낯선 외국인에게서 우리는 예수의 얼굴을 읽어내야 한다. 그들의 어눌한 한국어 발음 뒤에 숨겨진 고단함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대한민국 여권이나 주민등록증은 잠시 빌린 것일 뿐, 우리 모두의 진짜 본적지는 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나그네를 위한 변명, 그리고 초대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탄 여행자들이다. 누구는 일등석에, 누구는 삼등석에 탔을지 몰라도, 종착역은 같다. 성경은 끊임없이 외친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니라."
이주민의 날을 맞아, 마음의 빗장을 조금만 열어보자. 12년 된 병자를 위해 가던 길을 멈추고 눈을 맞추셨던 그 예수님의 파격적인 사랑이, 오늘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도 재현되기를 소망한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 이 땅에 '체류 허가'를 받은 영원한 이방인이고 이주민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