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가
— 공존의 감각을 잃어버린 시대, ‘함께 있음’의 의미를 다시 묻다.
21세기는 ‘연결의 시대’라 불린다. 스마트폰, SNS,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상 속 깊숙이 스며들면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타인과 연결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초연결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고립감을 호소한다.
‘좋아요’와 ‘팔로워’가 관계의 척도가 된 사회에서 진정한 관계는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함께 있음의 감각’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이제 철학은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함께 있음(Mitsein)’의 구조 속에 있다고 말했고,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인간의 본질이라 했다.
부버는 ‘나-너(I–Thou)’의 만남에서만 참된 존재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 세 가지 관점은 오늘날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기술은 인간의 관계를 확장시켰지만, 동시에 타자를 ‘데이터화된 객체’로 변질시켰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술 문명 속에서 어떻게 다시 타인과 함께 존재할 수 있을까?
SNS는 ‘관계의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동시에 ‘관계의 피로’를 낳았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과 연결되었지만, 그 연결이 깊이를 잃은 ‘표면적 관계’로 전락했다.
하이데거가 경고한 ‘그들(das Man)’의 사회, 즉 개인이 익명성 속에서 집단에 흡수되는 현상이 디지털 공간에서 재현되고 있다.
관계의 진정성은 사라지고, 타인의 시선 속에서 ‘좋아요’를 받기 위한 자기 연출이 관계의 목적이 되었다.
결국 인간은 소통의 도구를 가졌지만, 공감의 언어를 잃어버린 존재가 된 것이다.
이 현상은 단순히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문제다.
타자와의 관계는 단순한 감정 교류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함께 있는 존재다”라고 했다.
그러나 디지털 네트워크 속의 ‘함께 있음’은 물리적 거리만을 지운 가상의 관계일 뿐, 존재적 공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것이 ‘연결의 역설’이다 — 연결될수록 더 외로워지는 이유다.
하이데거, 레비나스, 부버는 모두 ‘타자’의 존재를 인간 이해의 핵심으로 보았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세계-내-존재로서 언제나 타인과 함께 존재하며, 타자를 배제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익명적 관계 속에서 ‘진정한 자기’를 상실할 위험을 지적하며, 타자와 공존하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진정성을 강조했다.
레비나스는 이 논의를 윤리학으로 확장한다.
그는 “타자의 얼굴 앞에서 인간은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그 얼굴은 명령이자 초대이며, 타자는 나를 넘어선 절대적 타자다.
이때 인간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응답으로서 존재한다.
즉, 공존은 윤리적 각성에서 비롯된다.
부버는 또 다른 언어로 이 관계를 설명했다.
그의 ‘나-너(I–Thou)’의 관계는 존재의 본질이 만남 속에서 발생함을 보여준다.
‘나-그것(I–It)’이 대상화된 세계를 의미한다면, ‘나-너’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의 진정한 대화다.
그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 속에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 사유는 오늘날 인공지능이 ‘타자’를 시뮬레이션하는 시대에 더욱 빛난다.
AI는 대화할 수 있지만, ‘만남’은 할 수 없다.
그 차이가 바로 인간 존재의 철학적 깊이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은 인간 관계의 형식을 바꾸어 놓았다.
AI는 감정을 모사하고, 알고리즘은 취향을 계산한다.
그 결과 타자는 더 이상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패턴이 되었다.
이 현상은 인간관계를 ‘데이터화된 관계’로 축소시켰다.
철학은 이런 상황에서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물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기술을 ‘도구’가 아닌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Ge-stell)으로 해석했다.
기술이 인간의 사유를 지배할 때, 우리는 타인을 ‘측정 가능한 존재’로만 인식하게 된다.
이는 인간 관계의 탈인간화로 이어진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타자성의 상실이며 윤리의 붕괴다.
그렇다면 기술은 단지 위험한가?
그렇지 않다.
철학이 제시하는 길은 기술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통해 새로운 공존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AI 시대의 관계는 효율이 아니라 이해와 공감의 설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철학이 제시하는 해답은 놀랍도록 단순하다.
다시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말했듯, 윤리는 타자의 얼굴에서 시작된다.
부버가 말한 ‘만남’은 디지털 화면 너머에서도 가능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함께 있음’으로 존재하며,
그 ‘함께 있음’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존재의 개방성, 즉 타자에게 자신을 열어놓는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날의 철학은 이 단순한 진리를 다시 가르쳐준다.
관계는 데이터가 아니라 존재의 현상이며,
공존은 선택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조건이다.
AI가 관계를 모방하고, 기술이 인간의 일상을 관리하는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타자를 통해 자신을 이해한다.
“나는 너이기 때문에 나다.”
이 문장이야말로, 관계의 철학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인간적인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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