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년은 왔지만 인생 설계는 없다” – 공직사회의 묘한 침묵
“당신의 다음 20년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이 단순한 질문에 대부분의 퇴직 공무원은 대답하지 못한다. 수십 년간 국가를 위해 일하며 정년을 채운 이들이지만, 막상 퇴직 후 인생의 설계도는 놀랍도록 비어 있다.
공직사회는 ‘입직’을 위한 시스템은 철저히 갖추고 있지만, ‘퇴직’을 위한 시스템은 없다. 신입 교육, 인사관리, 승진체계, 평가제도까지 모두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으나, 정년 이후의 삶은 공백이다. 마치 퇴직과 동시에 사회적 존재로서의 역할이 종료된다는 듯한 분위기가 팽배하다.
이런 현상은 단지 개인의 무계획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조직문화의 구조적 산물이다. 공직사회에서 “퇴직 후를 생각한다”는 것은 곧 ‘현직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퇴직 후 준비’는 불문율처럼 금기시되어 왔다. 그 결과 수많은 공무원들이 정년을 맞는 순간, 공백의 절벽 앞에 서게 된다.
“‘안정의 대가’가 만든 역설 – 퇴직 후 공백의 심리적 충격”
공직사회는 안정된 직장으로 인식되어 왔다. 평생직장, 연금, 명예퇴직, 복지 등은 오랜 세월 동안 ‘공무원의 특권’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안정이 바로 퇴직 후 불안의 씨앗이 되었다.
민간 기업의 직원들은 퇴직이 가까워질수록 새로운 일, 창업, 전직, 자격 취득 등을 고민하며 조금씩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반면 공직사회는 여전히 ‘정년=퇴장’이라는 공식에 갇혀 있다. ‘공직에서의 성취’ 외에 다른 자기정체성을 찾기 어렵다.
한 조사에 따르면, 50대 후반 공무원의 62%가 “퇴직 후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퇴직 후 3년 이내에 우울감이나 불안 증세를 경험했다”는 응답이 40%를 넘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 문제를 넘어, 공직문화가 만들어낸 집단적 사회문제다.
‘국가를 위해 일한 사람들의 노후가 불안하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공직사회가 안정적일수록, 구성원들은 불안정한 노후로 내몰린다. ‘안정의 대가’는 바로 자기 삶을 스스로 설계할 기회를 박탈당한 데 있다.
“퇴직 후 100세 시대, 공직자는 왜 준비되지 않았는가”
100세 시대, 인생의 절반 이상이 퇴직 이후에 펼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공직사회는 여전히 ‘정년 60세’를 마치 인생의 종착역처럼 바라본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제도와 문화의 불균형”으로 본다.
예를 들어 일본은 ‘재취업 지원센터’를 통해 퇴직 공무원에게 직업 상담, 사회봉사 연계, 창업 교육을 제공한다. 유럽은 ‘세컨드 커리어 플랜’ 제도를 통해 공직자가 50대 초반부터 직무 전환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승진 경쟁에 집중하며, 퇴직 후 지원 프로그램은 ‘형식적 재취업 교육’에 그친다. 퇴직 전 2~3개월짜리 단기 교육으로는 인생 30년을 설계할 수 없다.
심리학자들은 공직자의 퇴직을 ‘자기 상실의 과정’으로 본다.
공직에서의 직함, 조직, 규율, 권한 등이 사라지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직업 상실이 아니라, ‘정체성의 붕괴’다. 따라서 공직사회의 은퇴교육은 단순한 직업훈련이 아니라 ‘삶의 재구성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은퇴 리터러시가 필요하다 – 공직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
이제 공직사회에 필요한 것은 ‘퇴직자 지원 프로그램’이 아니라 은퇴 리터러시(retirement literacy)다.
은퇴 리터러시란, 퇴직 이후의 재정, 관계, 건강, 사회적 역할 등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공직자들이 재정적 안정만을 ‘준비된 노후’로 오해하는 한, 진정한 인생 2막은 시작되지 않는다. 문제의 본질은 돈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다.
정부 부처는 수많은 정책을 설계하면서도 정작 공직자의 인생 설계에는 무관심했다. 인사혁신처나 행정안전부가 ‘은퇴 전 교육’을 제도화하고, 일정 연차 이상의 공무원에게 ‘인생설계 교육’을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퇴직 후 사회적 기여, 공공자원봉사, 1인 창업, 지역 활동 등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해야 한다.
이제 공직사회는 ‘퇴직을 마무리로 보는 시각’을 버려야 한다. 공무원의 퇴직은 ‘공적 경력의 연속선’이어야 한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사회적 경험이 새로운 형태로 순환되는 과정이다.

“퇴직은 끝이 아니다, 진짜 시작이다”
퇴직은 결코 인생의 종착점이 아니다. 다만, 준비 없는 퇴직은 인생의 방향을 잃게 만든다.
공직사회가 진정으로 ‘공공’을 위한다면, 구성원의 퇴직 이후 삶 또한 공공의 일부로 바라보아야 한다.
공직자는 사회의 얼굴이다. 그들의 은퇴 이후 삶이 건강하고 생산적일 때, 그것이 곧 사회 전체의 품격을 높인다.
‘퇴직 후의 공직자’가 사회적 자산으로 남을 수 있도록, 이제는 조직이 먼저 변해야 한다.
퇴직은 끝이 아니다.
진짜 시작은, 정년 다음 날 아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