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분은 고개를 숙인 채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했다
.“제가 먼저 잘못한 건 없었습니다.” 말끝은 점점 작아졌고, 손은 테이블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연말 회식이 끝난 뒤 발생한 폭행 사건의 피해자 조사를 받으러 온 분이었다.
사건은 흔한 연말 풍경에서 시작됐다. 한 기업의 연말 회식 자리. 술잔이 오가고 분위기는 점점 과열됐다. 상사는 “연말인데 이 정도도 못 마시나”라며 잔을 채웠고, 피해자는 웃으며 몇 차례 거절했다. 자리는 웃음으로 넘겼지만, 회식이 끝난 뒤 골목에서 상황은 달라졌다. “기분 상하게 하지 말랬지.” 술에 취한 상사의 손이 먼저 나갔다. 주변에 있던 동료들은 말리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현장에 출동했을 때, 가해자는 “회식 분위기에서 생긴 해프닝”이라고 말했다. 피해자는 연신 “연말이라 참으려 했다”고 했다. 바로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연말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폭력 앞에서도 참고 넘기려 한다. 마치 연말이면 존엄도 잠시 미뤄도 되는 것처럼.
경찰관으로 근무하며 이런 사건을 수없이 봐왔다. 연말 회식 후 발생한 폭행, 폭언, 성희롱 사건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처음부터 신고하지 않는다. “회사 생활이 있으니까”, “괜히 문제 만들고 싶지 않아서”, “연말인데 분위기 깨기 싫어서”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 ‘참음’은 종종 깊은 상처로 남는다.

폭력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술자리라고, 연말이라고, 웃고 떠들던 자리였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는 없다. 회식은 선택일 수 있지만, 폭력은 결코 선택이 아니다. 그 경계를 흐리는 순간, 인권은 가장 먼저 무너진다.
조사를 마치며 그분에게 물었다. “왜 바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잠시 침묵하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말이라서요. 다들 바쁜데, 제가 문제를 만든 것 같아서요.” 그 말은 단순한 개인의 망설임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집단적인 무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말은 핑계가 될 수 없다. 존엄은 분위기에 따라 조절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들떠 있고 판단이 흐려지는 시기일수록, 인권은 더 단단히 지켜져야 한다. 술자리는 끝나도 상처는 남는다. 그리고 그 상처는 “연말이 지나면 괜찮아질”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연말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존엄을 너무 쉽게 넘기고 있지는 않았는지. 웃음 뒤에서 고개를 숙인 사람의 말을, 우리는 몇 번이나 외면했는지 말이다.
칼럼니스트 소개

전준석 칼럼니스트는 경찰학 박사를 취득하고 35년간 경찰관으로 근무한 뒤 총경으로 퇴직해 한국인권성장진흥원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사혁신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등에서 전문강사로 활동하며 성인지 감수성, 4대 폭력 예방, 양성평등, 리더십과 코칭, 인권 예방, 자살예방, 장애인 인식 개선, 학교폭력 예방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범죄심리학』, 『다시 태어나도 경찰』, 『그대 사랑처럼, 그대 향기처럼』, 『4월 어느 멋진 날에』가 있다.
경찰관으로 35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사람이 인권 침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문제가 있음을 몸소 깨달았다. 우리 국민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차별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인권이 성장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삼시세끼 인권, 전준석 칼럼]을 연재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