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편집자주) 이 글을 쓴 박동명 교수는 서울특별시의회 보건복지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보건의료·복지 정책과 예산, 관련 조례 심사 업무를 오랫동안 수행해 온 법학박사이다. 특히 의료·복지 현장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환자 보호를 강화할 수 있는 규제완화 방안을 모색해 온 실무 경험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다. 이번 칼럼은 미국 보건의료 정책과 신약개발 규제의 흐름을 짚어 보면서,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과 정책 담당자가 어떤 전략적 방향을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한 현장의 시각을 담고자 게재하는 것이다.
미국의 보건의료 정책 변화는 더 이상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의 최대 시장이자 규제 기준을 사실상 주도하는 국가이다. 미국에서의 정책·규제 변화는 곧 유럽, 아시아, 심지어 한국의 시장 구조와 기업 전략까지 흔들어 놓는다. 특히 고령화, 만성질환 증가, 재정 부담, 디지털헬스와 인공지능(AI)의 확산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미국의 보건의료 정책은 지금 대전환기에 서 있다.
이 글에서는 크게 세 가지 축에서 흐름을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고령화와 재정 압박 속에서 설계되는 보건의료 정책의 큰 방향, 둘째, 신약개발과 FDA 규제의 최근 변화, 셋째, 산업 규제 구조 재편과 그 속에서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이 모색해야 할 전략이다.
1. 고령화, 재정 안정, 디지털 전환이 만드는 새로운 질서
미국 보건의료 정책의 핵심 키워드는 요약하면 세 가지이다.
첫째,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 안정화이다. 미국은 메디케어·메디케이드 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어떻게 의료비 증가 속도를 늦출 것인가”를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두고 있다. 이를 위해 2022년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메디케어가 일부 고가 의약품에 대해 정부가 직접 약가를 협상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고, 2026년부터 10개, 2027년과 2028년에는 연 15개, 2029년 이후에는 매년 20개 약제에 대해 협상된 가격을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연방정부가 제약사와 본격적인 약가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는 구조를 만든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둘째, 약가 인하와 보험 보장성 조정이다. 약가 협상과 더불어, 미국 정부와 의회는 환자의 본인부담 상한 설정, 약가 인상률 상한, 바이오시밀러 사용 확대, 약국실사관리자(PBM)에 대한 감시 강화 등을 통해 고비용 구조를 조금씩 깎아내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제약산업계는 “혁신 저해”를, 소비자 단체와 일부 학계는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비판을 동시에 제기한다. 미국식 타협 구조가 약가 규제와 혁신 유인을 어디에서 절충할지, 향후 몇 년이 향배를 가르는 시기가 된다.
셋째, 디지털·AI 기술을 활용한 효율성 제고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급속히 확산된 원격의료와 디지털헬스는 이제 미국 보건의료 시스템의 ‘예외’가 아니라 일상적인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2022년 기준 미국 성인 진료 이용자의 약 40% 이상이 한 번 이상 텔레헬스를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고, 고혈압·심혈관질환 등 만성질환 환자의 비대면 관리가 빠르게 늘고 있다.
최근에는 메디케어가 만성질환 환자를 대상으로 디지털 모니터링과 팀 기반 관리에 정액 보상을 지급하는 실험적 지불모형을 추진하면서, 디지털 헬스가 보험 지불 구조 속에 본격 편입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미국 보건복지부(HHS)는 2025년 AI 활용 전략을 발표하고, 공공보건, 환자 관리, 행정 효율화 전 과정에 AI를 적극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내놓고 있다. 이는 한국을 포함한 각국 보건당국에도 “AI 보건의료 거버넌스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2. 신약개발과 FDA 규제: 속도는 빨라지고, 사후 관리는 더 엄격해진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특히 의약품을 담당하는 CDER의 최근 행보를 보면 하나의 방향성이 뚜렷하게 보인다. 신약 허가 속도는 빨라지지만, 허가 후 사후 검증과 안전성 관리는 더 엄격해지는 이중 전략이다.
2023년 FDA CDER는 기존에 한 번도 허가된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성분의 신약을 55개 승인했다. 2024년에도 50개의 신규 약물이 승인되며, 최근 10년 평균 46개 수준을 웃도는 높은 승인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희귀질환, 항암제, 혁신적 작용기전 신약으로, 미국이 여전히 세계 신약개발의 시험장이자 최종 무대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준다.
그러나 ‘빨리 많이 승인한다’고 해서 규제가 느슨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중대한 질환을 대상으로 한 가속승인(accelerated approval) 제도는 최근 몇 년 사이 추가적인 법령·가이드라인 정비를 통해 더 엄격한 조건이 붙고 있다. 예를 들어, 가속승인을 받으려면 허가 시점에 이미 확증적 임상시험을 설계·착수한 상태여야 하고, 실제 임상적 유익이 입증되지 않을 경우 신속하게 허가를 취소하거나 적응증을 축소하는 절차를 명문화하고 있다. 이른바 “먼저 시장에 내보내되,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빠르게 거둬들이겠다”는 접근이다.
디지털헬스와 진단 영역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관찰된다. 2024년 FDA는 실험실 개발검사(LDT) 를 명시적으로 의료기기 규제 범위에 포함하는 최종 규칙을 발표한 바 있다. 이는 동반진단, 유전자검사, 정밀의료 진단 분야에서 규제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려는 시도로 해석되었다. 다만 이후 법원 판결과 추가 규칙 제정 과정에서 해당 규제가 일부 철회·조정되는 등, 진단 규제 체계는 여전히 변동성이 큰 상태이다.
한편, 항생제 부족, 공급망 취약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안보 관점에서의 신속심사 프로그램도 등장하고 있다. 2025년에는 공중보건·국가안보상 우선순위가 높은 의약품을 2개월 수준의 초고속 심사로 처리하는 새로운 패스트트랙 제도가 도입되어, 첫 승인 사례가 나오기도 했다. 이는 미국이 신약개발과 공급망 정책을 더 이상 분리해서 보지 않고, 국가 전략산업 차원에서 통합 관리하려 한다는 신호이다.
결국 미국에서 신약을 개발·허가받는다는 것은, 빠른 시장 진입의 기회와 동시에 강화된 사후 검증의 책임을 동시에 떠안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이 미국 진출을 고민할 때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3. 산업 규제와 시장 구조 재편: 비용 절감과 공급망 안전이라는 이중 과제
정책 측면에서 미국은 “고비용 구조를 어떻게 낮출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약가, 보험, 공급망을 동시에 손보고 있다. 앞서 언급한 약가 협상 제도 도입 외에도, 미국 정부와 의회는
▷바이오시밀러 사용 확대를 위한 인센티브
▷약가 인상률의 물가 연동 규제
▷환자 본인부담 상한 설정과 저소득층 지원 강화
▷PBM에 대한 보고·투명성 의무 확대
등을 통해 시장의 가격 신호를 바꾸려 하고 있다.
공급망 측면에서는 코로나19와 지정학적 긴장 이후, 의약품·의료기기의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 내 또는 우방국 중심의 생산 거점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이른바 “안보형 공급망(security-based supply chain)” 구축 전략이다. 이는 단순한 보호무역이 아니라, 위기 시 필수 의약품과 의료장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보험 성격의 정책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의 경제·안보 연계가 부각된다. 미국은 한국, 유럽, 일본 등 우방국 기업이 참여하는 생산 클러스터, 합작 투자, 공동 R&D 펀드 등을 통해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투자를 유치하려는 전략을 펴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단순 수출을 넘어, 미국 현지 생산·R&D 거점 구축을 통해 “미국 시장 내부 플레이어”로 포지셔닝할 기회가 커지는 셈이다.
4.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에 열리는 기회와 과제
이러한 미국의 정책 변화는 한국 기업에게 도전이자 기회이다. 몇 가지 방향에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바이오시밀러·복제약·CMO/CDMO 분야에서의 비용 경쟁력이다. 미국의 약가 압박과 재정 부담은, 상대적으로 경쟁력 있는 단가와 품질을 갖춘 한국 기업에게 기회가 된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 미국에서 승인된 바이오시밀러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 기업의 제품이며, 미국 FDA가 승인한 바이오시밀러 중 한국 기업이 개발한 품목은 두 자릿수에 이른다. 한국은 이미 “바이오시밀러 강국”이라는 브랜드를 상당 부분 확보하고 있고, 미국의 비용절감 기조는 이러한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는 환경이다.
둘째, 혁신 신약과 디지털헬스를 결합한 패키지 전략이다. 고령화, 비만, 정신질환, 희귀질환 등 만성·난치 영역에서 새로운 기전의 약물이 적극 개발·승인되는 추세 속에서, 신약과 동반진단, 디지털 치료제, 환자 모니터링 솔루션을 하나의 패키지로 제안할 수 있는 기업에게는 더 큰 기회가 열린다. 미국 보건의료 시스템이 AI·데이터 기반 관리로 이동하는 만큼, 단순히 약 하나만 파는 모델에서 벗어나 “통합 헬스케어 솔루션 제공자”로 진화할 필요가 있다.
셋째, 통합적 시장·규제 전략의 중요성이다.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허가만 받으면 끝나는 시대가 이미 지났다.
이제는
▷FDA 허가 전략
▷메디케어·민간보험 등재 전략
▷실사용증거(RWE) 구축과 건강경제성(HEOR) 분석
▷병원·의사·보험자·PBM과의 관계 설정
까지 하나의 패키지로 설계해야 한다. 약가 협상과 보험 등재 결과가 곧 매출과 기업 가치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넷째, 정부·지방정부와의 동반 전략이다. 한국 기업이 개별적으로 미국 규제·시장 정보를 모두 따라잡기에는 비용과 인력이 부족하다. 한국 정부와 지자체가 역할을 나눠 “미국 보건의료·규제 정보 허브”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 FDA·CMS·민간보험 제도에 특화된 교육·연구센터 설립
▷미국 주요 바이오 클러스터(보스턴, 샌디에이고 등)와 연계한 공동 연구거점 운영
▷중소·중견기업을 위한 미국 진출 공동 법률·규제 자문 플랫폼 구축 등과 같은 방식이 가능하다. 이는 국가 차원의 산업 정책이자, 지방정부 입장에서는 지역 기업의 글로벌 진출을 돕는 전략 산업 육성 정책이 될 수 있다.
5. 결론: 변화의 방향을 읽는 자가 기회를 선점한다
미국 보건의료 정책과 규제는 앞으로도 비용 절감과 혁신 촉진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계속 진동할 것이다. 약가 협상과 재정 통제 장치는 더 강화될 가능성이 크지만, 동시에 혁신 신약, 희귀질환 치료제, 디지털헬스, AI 의료기술에 대한 정책적 지원과 신속심사 제도도 계속 확장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움직임을 수동적으로 “외국 동향”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태도이다. 미국 보건의료 정책의 흐름을 한 걸음 앞서 읽고, 한국의 제약·바이오, 디지털헬스, 의료기기, 진단 기업이 각자의 위치에서 전략을 재설계한다면, 미국 시장은 여전히 가장 크고 가장 전략적인 무대로 남을 것이다.
▷법학박사, 한국정책연구원 원장
▷선진사회정책연구원 원장, FDA 인허가·규제정책 컨설턴트
▷(사)한국공공정책학회 부회장
▷(전) 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교수
▷(전) 서울특별시의회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