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5년 다원예술 창작주체 선정 사업으로 추진되는 포럼 ‘제로의 창작’이 12월 20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다. 이번 포럼에서는 ‘비거니즘 전시 매뉴얼 ver.2’를 공개하며, 창작 재료 선택부터 전시 실행까지 예술이 환경과 비인간 존재에 지는 빚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 모색한다. 비인간 동물권과 노동 불평등, 지역 생태 실천까지 아우르는 발표가 하루 동안 이어질 예정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하는 2025년 다원예술 창작주체 선정 사업의 일환으로 포럼 ‘제로의 창작’이 12월 20일 토요일 서울 종로구 동숭길 122 ‘서울예술인지원센터’ 2층 세미나룸에서 열린다. 행사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 15분까지 진행되며, ‘비거니즘 전시 매뉴얼 ver.2’ 발표와 연계해 예술 창작과 전시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적·종차별적 문제를 다시 살펴보는 자리를 지향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작가 김화용이 총괄 기획을 맡고, 작가 하선우가 기획팀으로 함께했고, 여기에 큐레이터 강민형, 디자이너 어라우드랩(김보은·김소은), 작가 전유진이 매뉴얼 연구에 참여해, “작품을 어떻게 만들고,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것인가”라는 질문을 구체적인 지침으로 풀어냈다. 김화용은 그동안 작업을 통해 타자성과 비인간 동물을 가시화해 온 작가로, “예술이 사회적 불평등을 비판하면서도 내부 문제를 놓치는 역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고 말해 왔다.
포럼의 뿌리는 2020~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공예술기금에 선정됐던 프로젝트 ‘제로의 예술’로, 당시 프로젝트는 ‘과정의 제로’, ‘차이의 제로’, ‘제로의 거리’라는 세 가지 가치를 내세우며, 예술계 내부의 견고한 위계와 관성을 돌아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생태, 젠더, 세대, 지역성, 기술 윤리 등 동시대의 쟁점을 예술 현장과 연결해 살피는 과정에서 2021년 ‘비거니즘 전시 매뉴얼 ver.1’이 처음 선보였다.
1차 매뉴얼이 주로 전시 제작 과정에서의 세부 윤리와 실행 단계에 집중했다면, 이번에 공개되는 ‘ver.2’는 창작 단계에서의 재료 선택과 사용 방식까지 논의 범위를 크게 확장했다. 기획진은 “예술 창작은 태생적으로 환경에 빚을 지는 행위”라고 전제하면서, 어떤 재료를 쓰고 어떤 방식을 선택할지 자체가 중요한 윤리적 지점이라고 강조하면서, 다만 완전무결한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게 굳어진 창작·전시의 문법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빈 자리’를 열어 두고자 했다.
이번 매뉴얼의 특징은 그동안 논의의 주변부로 밀려났던 비인간 생명과 산업 재료의 이면까지 적극적으로 다룬다는 점으로, 전시나 교육, 연구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는 비인간 동물과 식물, 박제와 표본이 동원되는 관행, 그리고 공장과 유통망 속에 숨은 노동 불평등을 매뉴얼 안으로 끌어들인다. 기획진은 “우리가 사용하는 재료는 모두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생산된 ‘상품’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했다”며, ‘피 묻은 빵’뿐 아니라 ‘피 묻은 종이’도 존재한다는 점을 짚는다.
이 과정에서 ‘언두잉(Undoing)’이라는 개념이 핵심 키워드로 제시되는데, 언두잉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 멈춤이 아니라, 관성적으로 해 온 방식을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적극적인 상태”에 가깝다. 기획팀은 “우리가 하는 일이 곧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작동을 멈추게 하거나 취소시키는 실천이 언두잉”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를 위해 반복적으로 가벽을 세우고 부수는 구조, 짧은 전시 기간을 위해 많은 자원이 투입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로서 언두잉을 제안하는 셈이다.
창작 재료에 대한 시선도 크게 재정비되어, 매뉴얼은 전시를 위한 재료가 ‘일회성’을 전제로 움직이는 데 비해, 작품을 위한 재료는 ‘영속성’을 상정하는 시스템 속에 놓인다고 설명한다. 기후와 세월의 풍화를 피할 수 없는 행성 위에서, 예술은 보존을 이유로 변화를 최대한 배제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는데, 이는 생동하는 존재를 정지된 형태로 고정해 온 박제의 역사, 그리고 미술관·박물관 전시의 역사와 맞물렸있음을 선보인다. 기획진이 ‘지속 가능한 전시 매뉴얼’이나 ‘환경친화 전시 매뉴얼’이라는 이름 대신 ‘비거니즘’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도 이 같은 은폐된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하는 의지에서다.
일부에서는 비거니즘을 동물성 재료 사용 여부만을 가르는 잣대, 혹은 개인의 소비 선택에 국한된 운동으로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이에 대해 기획진은 “탄소 배출량이나 숲의 면적처럼 추상적 수치로만 환경을 이야기하는 대신, 비인간 생명에 대한 착취와 배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다”고 설명하며, 기후 정의와 지속 가능성을 논의하면서도 비인간 생명에 관한 문제는 곁가지로 밀려난 현실을 바꾸겠다는 취지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다양한 현장 사례와 연결한 포럼의 세부 프로그램은 오전 11시부터 11시 30분까지는 김화용·하선우가 ‘비거니즘 전시 매뉴얼 ver.2’의 개괄을 발표한 후 ,이어 11시 30분부터 12시 45분까지는 시각예술가·문화활동가·과학자가 함께하는 학제적 협업 팀 ‘신세틱 콜렉티브(Synthetic Collective)’가 ‘플라스틱 하트: 미술 전시의 환경적 영향을 줄이기 위한 DIY 현장 가이드’를 소개한다. 이 세션에는 영한 순차 통역이 제공된다.
점심 휴식 이후인 오후 1시 30분부터 2시 30분까지는 환경친화적 식물성 기반 물감을 직접 제작·사용하며 창작 가능성을 탐구해 온 윤다영(어몽트리아트)이 재료 연구 사례를 공유하고, 2시 45분부터 3시 45분까지는 디자인·건축 이론 연구자 김정혜가 ‘생기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창작 재료를 바라보는 발표를 진행하면서 폐기물과 물질성 연구를 바탕으로, 도시와 디자인 논의를 생태 담론과 연결해 온 경험을 들려줄 예정이다.
오후 4시부터 5시까지는 ‘지역과 긴밀하게 관계하는 것이 생태적 실천’이라는 주제로, 울산울주세계산악영화제 사례를 중심에 둔 발표가 이어진다. 무소속연구소 대표 임성연은 카페·프로젝트 스페이스 운영, 지역 기반 아트페어와 영화제를 기획해 온 경험을 토대로, 지역 문화 콘텐츠와 생태적 실천이 어떻게 맞닿는지 설명하고, 마지막 세션인 오후 5시 15분부터 6시 15분까지는 동물해방물결 대표이자 동물법 변호사인 김도희가 ‘비인간 동물을 소품으로 사용하는 전시를 법적으로 해석하기’를 주제로 발표한다. 김 변호사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비인간 동물을 도구화하는 관행을 법과 권리의 언어로 다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포럼은 접근성 측면에서도 세심하게 구성됐다. 행사는 대학로 현장 진행만으로 이루어지며, 수어 통역과 영한 통역, 문자 통역이 제공되고, 개최 장소인 서울예술인지원센터는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동선과 화장실, 엘리베이터를 갖추고 있어, 다양한 조건의 참여자가 논의에 참여할 수 있다. 참가를 원하는 사람은 사전 신청을 해야 하며, 온라인 신청 링크를 통해 접수하면 된다.
기획자 김화용은 이데올로기와 젠더, 정상성에 비판적으로 질문하며 영상·글·전시로 타자성과 비인간 동물을 가시화해 온 작가로, 그는 ‘닭’의 삶을 통해 가시거리 밖으로 밀려난 비인간 동물과 소수자를 바라보는 프로젝트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를 설치·퍼포먼스·다큐멘터리로 확장해 선보였고, 또한 ‘소금’을 매개로 경계 밖 존재들의 서사를 엮은 저서 『화성에도 짠물이 흐른다』를 발표했으며, 예술의 정치적 가능성을 고민하는 ‘옥인 콜렉티브’ 설립자이자 멤버로 활동했다. 이러한 경력은 이번 매뉴얼과 포럼의 질문에 깊이 스며 있다.
포럼 ‘제로의 창작’은 완성된 정답 대신 불완전한 시도와 토론을 공유하며, 예술이 스스로의 구조를 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기획진은 “우리는 오늘도 필패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실천을 이어 가고 있다”며 “그러나 그 실패의 층위가 쌓여 새로운 토대를 만들 것이라는 믿음으로 매뉴얼을 썼다”고 밝혔다. 예술가, 큐레이터, 디자이너, 연구자, 관람객이 함께 참여하는 이번 논의가 창작과 전시 현장의 작은 선택부터 바꿔 나가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