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면 속 한 사람의 삶이 던져준 조용한 울림
지난 주, 실내 자전거를 타며 하루를 정리하고 있었다. 땀이 맺힌 이마 위로 TV 화면이 켜졌고, 우연히 ‘2TV 생생정보’라는 프로그램이 걸렸다. 그날의 코너 제목은 “힘쓰니까 청춘이다: 본업은 래퍼, 생업은 페인트공.”
처음엔 그저 흔한 직업 소개 프로그램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화면 속 주인공의 삶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페달을 밟는 다리는 멈춰 있었고, 나는 온전히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10년 넘게 페인트칠을 해온 사람. 하루를 온몸으로 쓰며 생계를 책임지고, 밤이 되면 녹음실로 향해 랩을 녹음하고 곡을 만드는 사람. 생업은 페인트칠이었지만, 그의 본업은 여전히 ‘래퍼’였다.
현실을 견디기 위해 생업을 붙들되, 마음 깊은 곳에서 꿈을 흔들리지 않게 지키는 그 모습이 오랫동안 화면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나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내 삶에도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
퇴사 후 나는 전통찻집문화북카페, 자서전프로그램 강사라는 꿈을 품고 바쁘게 움직였다. 매일 글을 쓰고, 찻집을 찾아 정리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기관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밤늦게까지 커리큘럼과 수업 방식을 고민했다. 그 시간들은 분명 행복이었다. 기록이 주는 힘과 누군가의 인생을 글로 담아내는 과정은 내게 깊은 의미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계를 위해 다시 직장을 선택해야 했다. 꿈은 선명했지만, 책임져야 할 현실 역시 분명했다. 그 방송 속 래퍼처럼 나 또한 ‘현실을 위한 생업’과 ‘내가 꾸는 본업의 꿈’ 사이에서 늘 균형을 잡아가며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순간, 마음속에서 하나의 문장이 조용히 떠올랐다.
‘본업은 자서전프로그램 강사, 생업은 직장인.’
그 문장을 떠올리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 한 켠이 편안해졌다. 마치 누구도 대신 정리해준 적 없는 내 삶의 구조가 저 문장 하나로 깔끔하게 잡힌 느낌이었다.
“그래. 나는 직장인으로 돌아가지만, 내가 꿈꾸는 일은 사라진 게 아니다.”
“생업은 현실을 지켜주는 기반이고, 본업은 삶의 방향을 밝히는 불빛이다.”
“하루가 끝나면 다시 내가 좋아하는 일을 다듬어가면 된다.”
그 방송을 본 뒤, 나는 다시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생업과 본업, 서로를 채워주는 두 개의 기둥
생업은 내 일상을 지탱하는 역할이다. 반면 본업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어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말해주는 방향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두 가지가 서로를 채워주는 방식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다짐했다. 새로운 회사에서 주어진 역할은 책임감 있게 수행할 것. 그리고 퇴근 이후의 시간에는 자서전프로그램을 조금씩 더 다듬고, 매일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나의 기록을 이어갈 것.
꿈은 거창하게 폭발하듯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들여 묵히고, 다듬고, 깊어지며 어느 날 자연스레 중심에 올라오는 것이다. 페인트칠을 하며 래퍼의 꿈을 놓지 않던 그의 모습 덕분에 나는 다시 내 마음속 본업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조용히 내 이름을 불러본다.
‘본업은 자서전프로그램 강사, 생업은 직장인.’
이 문장은 앞으로 내가 걸어갈 삶의 방식이자, 두려움 대신 담담한 용기를 선택하는 하나의 태도가 될 것이다. 언젠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지금보다 더 크게 펼칠 날이 오겠지. 그 날을 위해 오늘은 생업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본업의 마음을 품은 채 조용히 한 걸음 더 내딛는다.
함께 생각해볼 질문
나는 지금 생업을 ‘현실의 벽’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본업을 지키기 위한 ‘기반’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본업은 마음을 지켜주고, 생업은 삶을 지켜준다.
두 가지를 함께 품고 걸어갈 때, 삶은 더 단단해지고 더 선명해진다. 오늘도 나는 생업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며, 본업의 길을 조용히 이어간다. 그 두 길은 결국 같은 곳을 향해 흐를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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