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룩의 회복을 향한 리더의 결단
예루살렘의 재건은 단순한 성벽의 복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진 신앙의 회복,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잠시 예루살렘을 떠난 사이, 성전은 다시 더럽혀졌다.
엘리아십 제사장이 이방인 도비야를 위해 성전 안에 방을 내어주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공간은 인간의 편의와 정치적 거래의 장소로 변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행정의 문제를 넘어, 신앙의 중심이 무너진 위기를 보여준다. 느헤미야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돌아와 성전을 정결하게 하며, 하나님 중심의 질서를 다시 세운다.
도비야는 느헤미야서 초반부터 예루살렘의 회복을 방해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성전 안에 들어와 머물게 된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실수로 볼 수 없다. 엘리아십 제사장은 정치적 편의와 인간 관계를 이유로 타협했다. 그 타협은 하나님 앞에서 ‘작은 선택’처럼 보였지만, 결과는 신앙의 붕괴였다.
오늘날 신앙인들도 종종 같은 유혹을 받는다. 편의와 관계,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조금씩 낮추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은 타협에서 무너진다. 느헤미야는 이를 명확히 보았고, 타협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질서를 위해 불편함을 감수했고, 성전의 순수함을 위해 인간적 관계를 끊었다.
느헤미야는 성전에 들어가 도비야의 방을 보고 “심히 근심하여”(느 13:8) 그 모든 가구를 던져내었다. 그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한 데 대한 거룩한 분노였다.
그는 도비야의 물건을 모두 내어던진 후,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다시 성전 그릇과 제물과 향을 가져왔다. 이는 단순한 청소가 아니라, 거룩의 회복 선언이었다.
오늘의 교회와 개인 신앙에서도 ‘도비야의 방’이 존재할 수 있다.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욕망, 타협, 세속적 가치가 그것이다. 느헤미야의 행동은 그 모든 방을 비우고, 하나님께 다시 공간을 내어드리라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도비야의 사건은 성전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 결과, 레위인들이 맡은 몫을 받지 못하고 각자의 밭으로 돌아가 버렸다(느 13:10). 예배의 중심이 사라졌고, 봉사의 손길이 끊어졌다.
느헤미야는 즉시 모든 레위인과 노래하는 자들을 불러 제자리에 세우고,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와 예물을 다시 정비했다. 하나님의 집을 바로 세우는 일은, 곧 예배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예배가 무너질 때 공동체는 방향을 잃는다. 느헤미야는 그 방향을 다시 세웠다. 그는 행정가이자 신앙의 개혁자였다. 그리고 그가 외친 중심 메시지는 오늘도 유효하다 — “하나님의 집을 잊지 말라.”
느헤미야의 개혁은 일시적인 분노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기도했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하옵소서.”(느 13:14)
그의 분노는 사랑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사랑, 그리고 공동체를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고자 한 결단이었다.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단순한 시스템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중심이다. 성도의 삶 속에서도 도비야의 흔적을 찾아내어 비워야 한다. 느헤미야는 보여주었다. 거룩은 싸움이고, 회복은 결단이라는 것을.
거룩은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성전의 방 하나가 더럽혀졌을 때, 그것이 공동체 전체의 타락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았다.
그의 분노는 곧 사랑이었다. 그는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웠고, 하나님께 예배의 중심을 돌려드렸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본문은 묻는다. “너의 마음의 성전은 깨끗한가?”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을 위해 다시 결단할 때다.
거룩은 회복될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