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팝의 응원봉, 민주주의의 촛불 - 칸트가 본다면 무어라 했을까?
K-팝 공연장의 수만 개 응원봉이 흔들릴 때, 하늘에는 거대한 빛의 파도가 일어난다. 그 빛은 단순한 조명 효과가 아니라, 팬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존재의 선언’이다. 반면 광장의 촛불은 고요하고 단단한 빛으로, 시민들이 스스로의 의지를 드러내는 행위다. 두 장면은 서로 다른 맥락에 존재하지만, 공통적으로 “빛”이라는 상징을 통해 집단적 의지의 표현을 공유한다.
응원봉은 산업화된 감정의 언어다. 기업과 팬덤, 그리고 문화산업이 만들어낸 ‘참여의 기술’ 속에서 빛은 정교하게 제어된다. 반대로 촛불은 통제되지 않은 자발적 빛이다. 그것은 개인이 스스로의 판단과 신념에 따라 밝히는 ‘자유의 불빛’이다.
칸트의 철학에서 ‘빛’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의 은유’다. 인간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고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의 상징이다. 응원봉과 촛불, 이 두 빛은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니지만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빛을 드는가?”
임마누엘 칸트는 1784년,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글에서 이렇게 썼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Sapere aude).”
응원봉을 든 팬들은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든 시민들은 어떤 가치와 정의를 위해 모인다. 그러나 칸트의 관점에서 보자면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행동하는가”이다. 즉, 타인의 명령이나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율적 의지’로 행동하느냐가 핵심이다.
K-팝 팬덤의 응원은 때로 상업적 구조 속에서 조율된 집단 행동이 된다. 반면 촛불집회는 사회적 불의에 대한 도덕적 항의로 읽힌다. 그러나 두 현상 모두 감정의 집합이자, ‘이성의 빛’과 부딪히는 장면이다. 칸트는 아마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대들이 드는 그 빛은, 타인의 의도에 의해 켜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이성에 의해 켜진 것인가?”
칸트의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은 “너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하라”는 도덕 원리로 유명하다. 이를 오늘날의 응원문화와 시민운동에 적용해보자.
응원봉을 드는 행위는 누군가를 향한 사랑과 지지의 표현이다. 그것이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폄하할 수만은 없다. 만약 그 행위가 타인을 해치지 않고,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함께 높인다면 칸트의 윤리학에서도 충분히 ‘도덕적 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
반면 촛불은 사회적 정의를 위한 행동이다. 하지만 다수가 모여 하나의 구호를 외칠 때, 그 안의 개별적 이성이 사라진다면 그것 또한 칸트가 경계한 “맹목적 집단주의”의 그림자가 된다.
칸트는 ‘자유로운 시민’이란,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이성으로 스스로의 도덕 법칙을 세우는 사람이라 말했다. 응원봉과 촛불은 바로 그 경계선에서, 감정과 이성이 공존하는 ‘현대적 윤리의 장’이 되고 있다.
칸트는 감정의 부정자가 아니었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이성의 질서 속에 감정을 위치시키려 했다. 그렇다면 응원봉과 촛불은 단순한 감정의 도구가 아니라, 이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형식의 언어라고 볼 수 있다.
K-팝의 무대에서 팬들은 서로의 빛으로 연결되고, 광장에서 시민들은 하나의 의지로 연대한다. 이 두 장면은 “공동체적 이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칸트의 철학이 말하는 자율은 ‘혼자 생각하는 힘’이 아니라, 모두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도록 돕는 관계적 자율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들어 올린 그 빛은 단순한 응원이나 분노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여전히 ‘이성의 빛’을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칸트가 이 장면을 본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들은 드디어, 감정 속에서 이성을 찾고 있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