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튀르키예 현 정치 상황의 핵심인 에르도안 정부의 탈세속주의 개혁과 이슬람 사상가 페툴라 귤렌이 이끈 종교 운동 사이의 심각한 갈등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에르도안의 집권당(AKP)은 복장법 폐지와 군부의 약화를 통해 공화국의 핵심 이념인 세속주의를 위협하는 일련의 정책을 추진해 왔다.
한때, 에르도안과 동반자 관계였던 귤렌의 ‘히즈메트’ 운동은 이슬람의 현대화를 추구하며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했지만, 그 궁극적인 목표는 세속주의 튀르키예공화국을 전복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2016년 쿠데타 시도로 이어졌다. 이 두 거대 이슬람 세력 간의 적대적 갈등은 향후 튀르키예의 정치적 혼란을 심화시키고, 현 정권의 비민주적인 정적 숙청과 대외정책의 변화를 초래할 것이 전망되었다. 특히, 미국과의 귤렌 관련 외교적 긴장, 국가비상사태 지속, 그리고 관광산업 타격 등의 경제적 어려움은 튀르키예의 민주주의와 미래에 대한 심각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서막: 황혼이 깃든 이스탄불, 그 묘한 적막 속에서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로 붉은 노을이 깔리고 모스크의 첨탑에서 '에잔(Ezan)'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우리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그리고 신성함과 세속이 끊임없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그 긴장감 때문이다. 바로 이 땅, 튀르키예의 현대사 한복판에 도저히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는 믿기 힘든 극단적인 파노라마를 그려낸 인물이 있다. 그의 이름은 페툴라 귤렌(Fethullah Gülen)이다.
누군가에게 그는 '호자 에펜디(존경하는 스승)'였고, 이슬람의 낡은 외투를 벗겨내고 과학이라는 새 옷을 입힌 선지자였다. 실제로 2008년, 미국의 권위 있는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그를 '세계 100대 지성' 중 1위로 꼽았다. 놈 촘스키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당대의 석학들을 제치고 말이다. 그러나, 역사의 시계 바늘이 불과 8년을 더 돌았을 때, 그는 조국 튀르키예를 피로 물들인 '테러리스트의 수괴'이자 '국가 전복의 배후'로 낙인찍혔다.
도대체 어떻게 한 인간이 '시대의 지성'과 '희대의 반역자'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이름을 동시에 가질 수 있었을까? 오늘 우리는 빛과 어둠이 공존했던 그의 삶을 통해, 신념이 권력을 탐할 때 어떤 비극이 잉태되는지, 그 서늘한 진실을 추적해 본다.
에르주룸의 바람과 아버지의 그림자: 사상의 잉태
모든 거목은 그 뿌리를 내린 토양을 닮는다. 1941년, 튀르키예 동북부의 에르주룸. 겨울이면 혹독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그 척박하고 보수적인 땅에서 귤렌은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독실한 이슬람 성직자, 이맘(Imam)이었다. 어린 귤렌의 귓가에는 언제나 아버지의 기도 소리와 코란을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왔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영혼을 형성하는 첫 번째 뼈대였다.
하지만, 청년이 된 그를 뒤흔든 것은 고리타분한 옛 경전만이 아니었다. 그는 운명처럼 한 사상가를 만난다. 바로 쿠르드 출신의 사이드 누르시(Said Nursi)였다. 누르시가 남긴 6천 페이지에 달하는 대작 『광명의 책들(The Books of Light)』을 읽어 내려가며, 귤렌은 전율했다. 당시는 과학만능주의와 서구 문명이 거대한 파도처럼 이슬람 세계를 덮치던 때였다. 많은 무슬림이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과학을 배우면 신앙을 잃는가? 신앙을 지키려면 문명을 거부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귤렌은 누르시를 통해 답을 찾았다. "아니다. 이슬람은 재해석되어야 한다. 과학과 신앙은 모순되지 않는다."
그는 여기에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의 영성을 결합했다.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영성,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녹여낸 그의 사상은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던 튀르키예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이것이 훗날 세상을 뒤흔들 '귤렌 종파'의 시작이었다.
'빛'을 향한 행진: 히즈메트(Hizmet), 봉사라는 이름의 혁명
귤렌은 탁상공론에 머무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현실 세계에 구현할 구체적인 '행동'을 원했다. 1960년대, 튀르키예는 좌우 이념 대립과 세속주의와 종교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때 귤렌은 총칼 대신 펜을, 화염병 대신 책을 들었다.
그가 주창한 운동의 이름은 '히즈메트(Hizmet)', 튀르키예어로 '봉사'를 뜻한다. 그의 논리는 명쾌하고도 매혹적이었다. 그는 세 가지 '빛'을 설파했다.
첫째, 알라는 빛이다. 이것은 변치 않는 진리다.
둘째, 지식은 빛이다. 여기서 그의 천재성이 드러난다. 그는 "종교는 의식(Conscience)의 빛이고, 과학은 지성(Mind)의 빛"이라 정의했다. 즉, 모스크에서 기도를 올리는 행위와 학교 실험실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알라를 향한 같은 예배라는 것이다. 이 말은 세속적 성공과 종교적 구원을 동시에 갈망하던 튀르키예 중산층에게 복음과도 같았다.
셋째, 선하게 사용하는 재물은 빛이다. 돈을 버는 것은 죄가 아니다. 단, 그 돈을 공동체를 위해, '봉사'를 위해 쓴다면 말이다.
이 가르침은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귤렌 운동은 튀르키예 전역, 아니 전 세계에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 학교들은 낡은 이슬람 신학교가 아니었다.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영어와 수학, 과학을 가르치는 엘리트 양성소였다. 부모들은 앞다투어 자녀를 그곳에 보냈다. 그곳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예의 바르고, 실력이 뛰어났으며, 무엇보다 '황금 세대'라는 자부심을 가졌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완벽한 교육 개혁이자, 이슬람의 현대화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말이다.
트로이의 목마: 가면 뒤에 숨겨진 제국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귤렌 운동, 즉, 히즈메트의 겉모습은 '평화'와 '봉사', 그리고, '종교 간의 대화'였다. 실제로 1998년, 귤렌은 바티칸을 방문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했다. 전 세계 언론은 그를 '이슬람의 온건한 얼굴', '화해의 사도'라 치켜세웠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999년 튀르키예 국방위원회 보고서는 충격적인 경고를 담고 있었다. 귤렌 운동이 말하는 '국가에 대한 봉사'가 실상은 '자신들만의 이슬람 제국을 위한 봉사'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전략은 치밀하고도 은밀했다. 그들은 마치 맑은 물에 잉크가 퍼지듯,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튀르키예 사회의 신경망을 장악해 들어갔다. 귤렌 학교를 졸업한 수재들은 사법부, 경찰, 군대, 언론, 교육계의 요직으로 진출했다. 그들은 겉으로는 공화국에 충성하는 척했지만, 내면의 충성심은 오직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호자 에펜디(귤렌)'를 향해 있었다.
한때 공개된 귤렌의 설교 영상은 그의 숨겨진 야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모든 국가 권력을 손에 쥐는 그 순간까지, 여러분은 혈관 속을 흐르는 피처럼 조용히 움직여야 합니다. 때가 되기 전에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거대한 섭리를 망치는 일입니다."
그것은 교육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속의 국가(State within a State)'를 건설하려는 거대한 기획이었다. 튀르키예라는 세속주의 공화국의 껍데기는 남겨두되, 그 알맹이를 자신들의 이슬람 이념으로 완전히 갈아 끼우려는, 21세기판 트로이의 목마였다.
엇갈린 운명: 에르도안과 귤렌, 형제에서 원수로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절정에 달한다. 현재 튀르키예를 통치하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페툴라 귤렌. 이 두 사람은 원래 한배를 탄 동지였다. 강력한 세속주의를 표방하며 이슬람 세력을 억압해 온 군부 기득권층에 맞서,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에르도안은 대중적인 정치권력을 쥐고 앞장섰고, 귤렌은 사법부와 경찰 내의 조직력을 동원해 뒤를 받쳤다. '이슬람의 부흥'이라는 같은 꿈을 꾸는 듯했다.
하지만 권력은 나눌 수 없는 법이다. 군부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두 거인은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기 시작했다. 에르도안에게 귤렌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자 자신을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반면 귤렌에게 에르도안은, 자신들이 만든 판 위에서 춤추는 말(馬)에 불과했다. 갈등은 2013년 뇌물 스캔들 수사로 표면화되었고, 마침내 2016년 7월 15일 밤, 끔찍한 파국을 맞이했다.
피로 물든 밤, 그리고 차가운 결말
2016년 7월 15일의 밤은 튀르키예 국민에게 잊을 수 없는 공포였다.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대교가 군인들에 의해 봉쇄되고, 앙카라의 하늘에는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날아다녔다. 국회의사당에 폭탄이 떨어졌다. 쿠데타였다. 당시 에르도안 대통령은 휴대전화 화상 통화로 국민에게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맨몸의 시민들이 탱크 앞을 막아섰다. 수백 명이 목숨을 잃고 수천 명이 다친 그 참혹한 밤이 지나고,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에르도안은 주저 없이 배후로 귤렌을 지목했다. "이것은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군대를 청소할 기회다." 이후 벌어진 일은 숙청이라기보다 전쟁에 가까웠다. 귤렌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수십만 명의 공무원, 군인, 교사, 판사들이 해직되거나 체포되었다. 귤렌이 세운 학교는 폐쇄되었고, '히즈메트'라는 단어는 금기어가 되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은둔하던 귤렌은 끝까지 자신은 쿠데타와 무관하다고 항변했다. 그는 에르도안이 자신을 제거하고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꾸민 '자작극'일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그는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그리고 2024년, 83세를 일기로 페툴라 귤렌은 타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때, 튀르키예의 영적 스승으로 추앙받던 그는, 결국, 장례식조차 조국에서 치르지 못하는 쓸쓸한 객사(客死)로 생을 마감했다.

귤렌이 남긴 질문,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몫
페툴라 귤렌의 삶은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종교적 신념이 정치적 야망과 결합했을 때, 그것은 과연 순수한 '빛'으로 남을 수 있는가? 교육과 봉사라는 가장 숭고한 가치가 권력 획득의 수단으로 변질될 때, 사회는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귤렌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상처와 유산은 여전히 튀르키예 땅에 깊게 박혀 있다. 에르도안 정권은 귤렌 조직 척결을 명분으로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튀르키예 사회는 '친(親)에르도안'과 '반(反)에르도안', 그리고 숨죽인 귤렌 지지자들로 나뉘어 보이지 않는 내전을 치르고 있다.
이제 전 세계의 이목은 귤렌 사후의 '히즈메트' 운동이 어디로 갈 것인지, 그리고 그의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지에 쏠려 있다. 조직은 와해될 것인가, 아니면 지하에서 새로운 싹을 틔울 것인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지금 당장 귤렌은 패배자이자 반역자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먼 훗날, 역사가가 먼지를 털어내고 이 시대를 다시 펼쳐 보았을 때, 과연 에르도안과 귤렌 중 누가 튀르키예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누가 튀르키예를 망가뜨렸다고 평가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보스포루스의 물결은 말이 없다. 그저 어제와 다름없이 유럽과 아시아 사이를 흐르며,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 그리고 그 속에 피어났던 헛된 꿈들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지금 튀르키예는, 그리고 우리는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숨죽이며 넘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