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찰관님, 저는 크리스마스가 제일 무서워요.” 15년 전 겨울, 새벽 지하철역에서 만난 60대 노숙인 박 씨의 말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의 웃음과 불빛이 넘치는 이 시기가 오히려 가장 두렵다고 했다. “다들 행복해 보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혼자예요.”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만 고립된 듯한 감정이 더 깊어지는 현실. 그 순간 연말이 모두에게 같은 온도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느꼈다.
설날 당직 중 방문했던 80대 김 할머니의 집은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다. 방은 고요했고 냉장고는 비어 있었다. 명절 음식을 준비할 흔적조차 없었다. “명절 방송 보면 채널 돌려요. 괜히 더 허전해지니까요.” 담담한 말투였지만 벽에 걸린 낡은 가족사진을 바라보는 눈빛은 오래 머물렀다. 그날 함께 끓여 먹은 라면 한 그릇이 할머니의 텅 빈 명절 상을 조금은 덜 쓸쓸하게 해주었기를 바랄 뿐이다.
아동보호시설에서 인권교육을 마치고 돌아서려던 순간, 한 초등학생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경찰 아저씨, 크리스마스에 우리 엄마 찾아줄 수 있어요?” 아이의 크리스마스 소원은 선물도, 장난감도 아니었다. “엄마가 잘 지내냐고 한마디만 해줘도 돼요.” 현실적으로 이루기 어려운 소원을 들으며 어른으로서 마음 한켠이 무너졌다. 시설 선생님은 “연말이면 아이들이 유독 예민해져요. TV 속 행복한 가족들이 자꾸 눈에 들어오니까요”라고 했다.

추석 연휴, 공단 기숙사에서 만난 베트남 출신 노동자 웬씨는 영상통화를 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3년 만에 보니까… 어머니가 많이 늙으셨어요.” 귀향을 꿈꾸지만 비싼 항공권, 빡빡한 일정 때문에 매년 고향에 갈 수 없었다.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이주노동자들이지만, 명절의 따뜻함은 쉽게 그들에게 닿지 않는다.
그러나 희망이 보인 순간도 있다. 9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한 아파트 단지에서 주민들이 독거노인들을 초대해 마련한 작은 식사 자리였다. 20여 명의 어르신이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고, 아이들은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그 선물을 받으며 연신 눈물을 닦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큰 제도나 정책보다 이런 작은 정성과 따뜻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자리였다.
연말은 사회의 온도를 확인하는 시기다. 한편에서는 반짝이는 불빛과 웃음이 넘치지만, 다른 한편에는 외로움과 고립을 견디는 이들이 있다. 우리가 건네는 짧은 안부와 작은 관심은 그들의 겨울을 바꾸는 첫걸음이 된다. 문 앞에서 건네는 “괜찮으세요?”라는 말, 거리에서 마주친 노숙인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 이주노동자에게 전하는 짧은 안부는 모두 일상 속에서 자라는 인권의 씨앗이다.
올해 연말만큼은 주변을 조금 더 돌아보자. 누군가에게는 우리가 건네는 작은 친절이 1년 중 가장 따뜻한 순간이 될 것이다. 서로의 삶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것이 인권이 지향하는 방향이며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품격이다.
칼럼니스트 프로필

전준석 칼럼니스트는 경찰학 박사를 취득하고 35년간 경찰관으로 근무한 뒤 총경으로 퇴직해 한국인권성장진흥원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사혁신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등에서 전문강사로 활동하며 성인지 감수성, 4대 폭력 예방, 양성평등, 리더십·코칭, 인권 예방, 자살예방, 장애 인식 개선, 학교폭력 예방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범죄심리학’, ‘다시 태어나도 경찰’, ‘그대 사랑처럼, 그대 향기처럼’, ‘4월 어느 멋진 날에’가 있다.
경찰관으로 35년간 근무하며 현장에서 다양한 인권 침해 사례를 목격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민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때 차별이 사라지고 인권이 성장한다고 믿으며 ‘삼시세끼 인권, 전준석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