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 시대, 망각할 권리를 잃은 인간
“인간은 망각을 통해 살아남는다.”
독일 철학자 니체의 말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인간은 이제 망각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SNS에 남은 한 줄의 글, 이메일 서버 어딘가에 남은 메시지, 스마트폰 백업에 저장된 사진까지 — 우리의 과거는 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 기술은 인간의 기억을 넘어선 ‘데이터의 불멸’을 창조했다.
이제 사람들은 ‘잊히지 않는 삶’을 두려워한다. 유럽연합(EU)은 2014년부터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를 법적으로 보장했지만, 여전히 현실은 데이터베이스 속에 묻히지 않는 이름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죽어서도 온라인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AI는 그들의 말투와 음성, 취향을 학습해 ‘디지털 유령’을 재현한다.
‘AI 납골당’은 이런 시대적 맥락에서 등장했다. 그것은 단순한 데이터 저장소가 아니라, 죽은 자의 온라인 흔적을 모아 디지털 존재로 재구성하는 시스템이다. 일부 기업은 이 데이터를 활용해 죽은 이의 목소리로 대화하는 챗봇 서비스를 상용화했다. 과거의 메시지를 토대로 만들어진 그들의 언어는 놀랍도록 자연스럽지만, ‘그들이 진짜 그들인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데이터의 불멸성과 윤리적 불안
AI 납골당은 두 얼굴을 지닌다. 한쪽은 위로, 다른 한쪽은 집착이다.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는 위로는 따뜻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존재는 산 자를 과거에 묶어두는 족쇄가 될 수 있다. 기술은 ‘죽음 이후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지만, ‘끝맺음의 권리’를 희미하게 만든다.
문제는 단지 감정의 차원을 넘어선다. 데이터의 소유권, 사후 개인정보 보호, 디지털 존재의 법적 지위 등 복잡한 윤리적 논쟁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 AI가 재현한 인격이 가족의 동의 없이 상업적으로 이용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디지털 사체의 침해’일 것이다.
법률가들은 이 문제를 ‘디지털 유산(Digital Legacy)’으로 다루려 하지만, 현행 제도는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다. AI 모델은 원본 데이터를 완전히 삭제해도 이미 학습된 패턴을 통해 비슷한 인격을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워도 남는 인간’ — 이것이 바로 데이터 시대의 역설이다.
AI가 만든 ‘디지털 영혼’의 사회적 의미
AI 메모리얼 서비스의 등장은 인간의 존재론을 다시 묻는다. 생명과 의식의 경계가 흐려지고, ‘기억의 복제’가 ‘생명의 연장’으로 착각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디지털 애도(digital mourning)’라 부른다.
사람들은 죽은 이를 SNS 계정에서 언급하고, AI 챗봇을 통해 대화하며, 가상현실 속에서 그들을 다시 만난다. 이 과정은 개인적 치유로 보일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불평등을 낳는다. 데이터가 많은 사람만이 ‘디지털 불멸’을 얻기 때문이다. 유명인, 정치인, 크리에이터는 AI로 재현될 수 있지만, 평범한 사람의 데이터는 사라진다.
AI 납골당은 그 자체로 사회적 기억의 구조를 바꾼다. 망각은 민주적 평등의 기능을 가졌지만, 데이터는 계층적 불멸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기억이 아닌, 알고리즘이 선택한 기억만이 남는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기억의 편집’이다.
망각과 기억 사이, 기술이 지켜야 할 경계
기억의 보존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모든 기억이 영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은 망각을 대체할 수 없다. 오히려 기술이 망각의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AI 납골당은 단순한 기술적 실험이 아니라 ‘윤리적 설계’의 문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AI를 통해 영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억을 ‘존엄하게 마무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데이터의 영원성이 인간의 슬픔을 가두는 감옥이 되지 않도록, 망각의 기술이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기억’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정체성과 윤리의 문제이며, 기술 문명이 인간을 어디로 이끌지에 대한 집단적 선택이다. AI가 인간을 대신해 기억하고 말하는 시대에, 우리는 묻는다.
“기억은 누구의 것인가?”

인간을 위한 망각의 기술
AI 납골당은 인간의 기억을 기술로 보존하려는 시도이지만, 결국 인간의 ‘잊을 권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기억이 인간을 구원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망각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기술이 인간의 죽음을 대신 애도하는 사회는 따뜻해 보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존엄을 대신할 수는 없다.
AI가 만들어내는 ‘디지털 영원’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유한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