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오스크 앞에서 멈춰 선 어르신들
“버스표 한 장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운 세상인가.”
시외버스 터미널 한켠, 요란한 화면 앞에 선 노인이 중얼거렸다. 현금은 손에 쥐고 있지만, 손가락은 어디를 눌러야 할지 몰라 허공만 맴돈다. 뒤에서는 조급한 한숨이 이어지고, 결국 직원이 오길 기다리다 버스 출발 시간이 지나가 버린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불편한 단면을 보여준다.
편리함을 위해 도입된 ‘무인화’ 시스템은 효율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편리함’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특히 키오스크는 고령층에게 새로운 ‘문턱’이 되었다. 글씨는 작고, 메뉴는 복잡하며, 잠시 머뭇거리면 “초기화됩니다”라는 안내문이 차갑게 뜬다. 인간의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는 기계 앞에서, 그들은 ‘사용자’가 아니라 ‘방문자’로 머문다.
효율의 이름 아래 사라진 ‘배려의 기술’
무인화는 기업의 비용 절감과 효율성 향상을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사회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배려의 기술’을 잃은 과정이기도 하다. 한때 버스표를 끊어주던 직원의 미소, 메뉴판을 설명해주던 점원의 말 한마디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적 연결을 유지하는 기술, 즉 ‘관계의 기술’이었다.
이제 우리는 빠름과 효율이라는 새로운 가치 아래에서 인간적인 느림을 밀어냈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존엄을 높여야 한다는 전제는 어느새 ‘생산성’이라는 단어에 가려졌다. 하지만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사회적 소외도 함께 커지고 있다. 특히 정보 접근성이 낮은 노인층은 “디지털 배제”라는 새로운 형태의 차별에 직면해 있다.
디지털 문맹이 아닌 시스템 문맹의 사회
많은 이들은 “어르신들이 스마트폰을 배우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학습 능력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배워야만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 사회의 기본 구조가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대중교통, 은행, 병원 예약, 음식 주문, 심지어 정부 민원 서비스까지 ‘비대면’을 기본값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용하기 어려운 사람’을 고려하는 설계는 뒷전으로 밀린다. 결국 시스템 자체가 인간을 배제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디지털 격차는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다. 이는 사회의 공공성에 대한 문제이며, 민주주의의 접근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국가가 모든 국민을 동등하게 서비스해야 한다면, 디지털 전환은 누구도 뒤처지지 않게 설계되어야 한다.
사람을 위한 기술,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술은 인간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무인 시스템의 효율과 자동화의 속도는 분명 사회의 진보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 속도가 너무 빨라져 ‘사람’을 잃고 있다면, 우리는 기술의 본래 목적을 잊은 것이다.
정부와 기업은 “디지털 포용”이라는 구호를 외친다. 하지만 그 실천은 여전히 부족하다. 모든 키오스크 옆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안내 인력, 도움 버튼, 혹은 음성지원 같은 기술적 보완이 필요하다. 인간의 존엄은 ‘터치 한 번의 성공’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느끼는 존중과 배려에서 비롯된다.
우리 사회가 진정한 디지털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선, ‘기계 없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는 기술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 도구가 될 때, 비로소 진보라 부를 수 있다.

키오스크 앞에서 길을 잃은 노인은 결코 기술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한국의 산업화를 일으켰고, 오늘의 디지털 사회를 가능하게 한 세대다.
그에게 필요한 건 ‘교육’이 아니라 ‘배려’다.
무인시대의 역설은 여기 있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더 큰 고립을 경험하고 있다. 기술은 편리함을 주었지만, 그 편리함의 문턱이 인간을 가로막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의 기술은 정말 사람을 위한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