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찬 공기는 손끝을 시리게 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따뜻함이 있다. 커다란 김장 통 앞에 사람들이 모여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버무리는 장면은 어느새 한국 겨울의 풍경화가 되었다. 흰 김이 피어오르는 골목 어귀마다, 배추잎을 나르며 웃음소리를 섞는 사람들. 그것은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한 해를 정리하고 서로의 온도를 확인하는 의식에 가깝다.
김장 봉사는 오래전부터 이웃의 삶을 잇는 작은 다리였다. 과거에는 마을 어귀마다 ‘함께 김장하던 날’이 있었다. 며느리, 어머니, 이웃이 한자리에 모여 웃으며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나누며 정을 쌓았다. 오늘날에는 ‘사랑의 김장 나눔’, ‘김장 봉사 주간’ 같은 이름으로 변했지만, 본질은 여전히 같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일, 그게 바로 김장의 힘이다.

나눔의 전통이 이어온 한국의 정(情)
김장은 단순한 저장 음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상징’이다. 예로부터 한국의 겨울나기는 김장으로 시작됐다. 김치를 담그며 가족의 안부를 묻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손을 나누었다. 배추를 한 포기 더 절이는 일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1990년대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전통은 점점 사라지는 듯했지만, 오히려 김장 봉사는 새로운 방식으로 부활했다. 기업, 학교, 종교단체, 지자체가 손을 맞잡고 ‘사랑의 김장 나눔’ 행사를 펼치기 시작했다. 배추 한 포기가 소외된 이웃의 겨울 밥상에 오르며, 이웃의 삶을 지탱하는 ‘온도의 연결선’이 된 것이다.
이제 김장은 한 가정의 일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연대 프로젝트’로 자리 잡았다. 서울, 부산, 광주, 대구 등 전국 곳곳에서 진행되는 김장 봉사는 매년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국민적 행사로 발전했다. 그 속에는 ‘정’이라는 한국 고유의 정서가 여전히 숨 쉬고 있다.
김장 봉사 속의 사람들
김장 봉사의 현장을 들여다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함께함의 기쁨’이다. 한쪽에서는 학생들이 손수 배추를 씻고, 다른 쪽에서는 어르신들이 버무린 양념을 김치통에 담는다. 세대와 직업을 넘어선 협력의 장이다.
한 봉사자는 이렇게 말했다.
“배추 한 포기라도 더 담가서 누군가의 밥상 위에 올라간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의 말에는 단순한 봉사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김장 봉사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구분을 허문다. 함께 웃고, 함께 양념을 버무리는 동안 우리는 같은 냄새를 맡고 같은 수고를 나눈다. 그 순간, 나눔은 계층을 초월한 ‘사람의 일’이 된다.
학자들은 김장 봉사를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회복으로 본다. 즉, 개인주의로 기울어진 도시 사회에서 잃어버린 연대의 감각을 되살리는 행위다. 김장 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봉사 후 행복감이 높아지고, 지역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회복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사랑의 온도계’가 오르는 이유
‘사랑의 온도계’는 단지 기부 금액을 표시하는 지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체온’을 재는 상징이다. 누군가의 밥상에 따뜻한 김치 한 접시가 올라가는 일, 그것은 그 사회가 얼마나 서로를 돌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2024년 기준, 전국에서 진행된 김장 나눔 행사는 2만 건을 넘었다. 서울만 해도 시민단체와 기업이 참여한 김장 봉사 규모가 200만 포기를 넘어섰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봉사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이는 한국 사회가 위기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힘’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다.
배추 한 포기를 다듬는 손끝은 작은 노동 같지만, 그것이 모이면 거대한 온기가 된다. 이 봉사는 수치가 아닌 ‘온도’의 문제다. 체온 36.5도의 인간미가 서로를 덥히는 순간, 사랑의 온도계는 스스로 오르게 된다.
김치통 속에서 익어가는 미래
김장 봉사는 단지 과거의 전통을 재현하는 행사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따뜻한 나라’임을 확인하는 증거다. 배추 잎 사이로 스며든 양념처럼, 사람의 마음도 천천히 숙성된다. 그 마음은 겨울을 버티게 하고, 새로운 봄을 기다리게 한다.
이 작은 나눔의 손길이 더 많은 이웃에게 전해질 때, 한국 사회의 사랑의 온도는 더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같이’의 힘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힘은 언제나 김치 한 통 속에서, 조용히 익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