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세월이 참 빠르다. 젊은 시절에는 무심이 지나쳤던 삶과 죽음의 경계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운명은 죽음이다. 평상시 일상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쉽게 잊고 지낸다. 그러다가도 친구나 가까운 지인의 갑작스러운 비보가 날아들고, 투병 소식이 들려올 때면, 그 망각의 장막을 찢고 들어와, 우리에게 아픔과 서글픔, 그리고 큰 충격 속에 빠뜨린다.
얼마전, 젊은 청년같이 살던 고교 동창이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는 그 친구를 만난 것이 인생에 최고의 행운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미국에 거주하는 동창은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았던 기억만으로도 영광 이었네” 라는 추모 글을 올리며 못내 아쉬워 했다. 뜻밖에 동창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갑자기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였다. 지금 내 인생은 잘 살아내고 있는 걸까? 세상 하직하는 날 나의 영정은 무슨 말을 들으며 떠날까? 미로에 빠진 듯 한참 동안 혼란스러웠다. 가치 있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들 죽음은 순서 없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남겨진 우리는 세상에서 경험하는 상실의 슬픔을 단지 절망으로만 끝나서는 안된다.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성찰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저 ’덤‘이 아니라, 가장 원숙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최고의 기회 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한없이 연약한 존재다, 삶이 죽음 앞에 흔들리고, 고통스러울 때 마다 신앙에 의존해 왔다. 동양과 서양의 대표적 종교인 기독교와 불교는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하며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가르켜준다.
기독교에서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영생과 부활을 향한 소망의 문이다. 현세의 삶은 천국이라는 본향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의 여정이라 한다. 이러한 믿음은 현세의 고난을 이겨낼 힘과 평안을 주게 되는 것이다.
반면, 불교에서는 죽음을 ‘윤회’ 의 한 단계로 본다. 현세의 삶에서 지은 업보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고 한다. 현세의 업보를 잘 닦아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여 열반의 평화에 이르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통찰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완성하는 필수적인 배경임을 깨닫게 한다. 만약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오늘 하루의 소중함, 사랑하는 사람과의 순간, 작은 기쁨의 가치를 이토록 절실하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시간의 한계가 있기에, 우리는 현재에 더욱 충실하려고 노력 한다
투병 중환자의 “하루만 더, 햇볕을 온전히 느껴 보고 싶다” 는 간절한 절규는 생명의 유한함을 절감하게 한다. 나아가 삶에 대한 새로운 마음가짐을 다지게 한다. 우리는 인생 행복 나무에 꽃을 피우는 삶의 밀도를 높여가야 한다
첫째는, 시간의 소중함을 재인식 하자.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불필요한 걱정이나 욕망, 시기, 질투, 집착에서 벗어나자
둘째는, 진심 어린 진정한 관계를 회복해 가자.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는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수도,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없다. 남겨진 소중한 친구와 동기 동료와 가족들에게 집중하고, 후회 없이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자. 따뜻한 관계는 삶의 마지막까지 우리를 지탱해 줄 든든한 기반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내면의 평화를 추구해 가자. 이제 물질적인 성공을 넘어 자기 정신적 영적인 수양의 시간을 늘려 내면을 풍요롭게 만들어가자.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 앞에서 평온해질 수 있을 것이다.
삶은 덧없이 흘러가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영원한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단상은 바로 삶에 대한 찬사다. 우리 삶의 불꽃은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가치있는 불꽃을 비추며 기쁨과 충만한 삶으로 뜨겁게 나아가자.
양홍석
전)문화체육관광부 일반직고위공무원
전)2014인천아시안게임 행사본부장
전)강원랜드 카지노본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