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속의 시작, 작은 통장 한 권
아들의 첫 돌을 앞두었던 2020년 12월 31일. 그날은 유독 선명하다. 은행 창구에서 아들 이름으로 된 첫 주택청약통장을 만들고, 첫 입금으로 2만 원을 넣던 순간의 표정과 마음까지도 여전히 또렷하다. 작은 금액이었지만 그 안에는 부모로서의 다짐과 책임감, 그리고 아이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고 싶다는 조용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돌도 안 된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들, 아빠가 끝까지 채워서 너에게 선물할게.” 그 말은 약속이었고, 스스로에게 건 결심이었다.
흔들리는 현실 앞에서
그후 몇 년 동안 어떻게든 꾸준히 입금했다. 월급이 넉넉하든 그렇지 않든, 매달 아들의 통장을 먼저 챙겼다. 그 마음 하나로 버텼다. 그러나 올해, 상황은 바뀌었다. 퇴사 이후 멈춰버린 수입, 빠짐없이 다가오는 지출들, 흔들리는 가계의 균형.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깊숙이 묻어두었던 선택지가 불쑥 떠올랐다. “청약통장을 건드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 문장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검은 물방울처럼 떨어졌고, 불편함은 서서히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향한 질문들
은행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유난히 무거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마음 한구석은 계속 망설였다. 해지 요청을 창구에서 말하는 동안, 직원의 설명은 빠르게 흘렀지만 내 감정은 느리고 아팠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아닐까.”
“책임감 있는 부모라면 버텼어야 했던 것 아닐까.”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한 선택을 반복하는 걸까.”
그 질문들은 짧았지만 깊었다. 해지 절차는 빠르게 끝났지만,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느낀 마음의 무게는 길고도 묵직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
그러나 그 무게 가운데서 하나의 문장이 천천히 떠올랐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 문장 앞에서 마음은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번 해지는 실패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다짐이 생겼다. “언젠가 다시 만들자. 다음에는 어떤 상황이 와도 흔들리지 말자.”
삶은 언제나 계획대로 흐르지 않는다. 자랑스러운 선택도 있고, 조금은 부끄럽고 아픈 선택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선택은 결국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한 조각이다.
삶의 무게가 만든 선택일 뿐, 부족함의 증거는 아니다
누구나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견딘다. 어떤 선택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그 선택 뒤에는 누구보다 깊은 고민과 책임이 숨어 있다. 이번 선택 역시 나를 부족하게 만드는 선택이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지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나는 다시 시작할 힘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비어 있어도, 언젠가는 채워 넣을 수 있는 마음의 여지도 있다. 그리고 다음에는 반드시 지킬 것이다. 아들에게 한 약속을, 스스로에게 한 그 다짐을.
함께 생각해볼 질문
우리가 부끄럽다고 느끼는 선택도, 사실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버텨낸 용기일 때가 있다. 나는 지금 내 삶의 어떤 선택 앞에서 스스로를 판단하고 있는가. 그 판단은 정말 나를 위한 것인가.
오늘의 선택은 실패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내려놓은 잠시의 멈춤일 뿐이다.
비워진 통장은 다시 채울 수 있고, 흔들린 다짐은 다시 세울 수 있으며, 부끄러움은 배움으로 바꿀 수 있다. 삶은 결국 다시 시작할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또 다른 길을 열어준다. 나는 그 사실을 믿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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