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력적이었던 더위가 거짓말처럼 물러갔다. 끈적하게 달라붙던 습기가 빠져나간 자리에, 어느새 건조하고 서늘한 바람이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한다. 계절의 바뀜은 늘 예고가 없지만, 유독 가을의 도착은 기습적이다. 어제까지 입었던 얇은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이 서늘함은 우리에게 물리적인 감각 이상의, 서늘한 각성을 요구한다. 바야흐로 사색의 계절, 가을이 당도했다.
가을은 수직의 계절이다. 하늘은 한없이 높아져 그 천장을 가늠할 수 없고, 반대로 나무들은 가장 낮은 곳으로 자신의 분신들을 떨군다. 이 상승과 하강의 대비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게 된다. 여름이 발산하고 팽창하는 욕망의 시간이었다면, 가을은 수렴하고 응축하는 성찰의 시간이다.
우리는 흔히 가을을 '낙엽의 계절'이라 부르며 떨어지는 것들의 쓸쓸함에 주목한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 더 깊은 곳으로 옮겨보면, 가을은 잎의 계절이 아니라 '뿌리의 계절'임을 알게 된다. 나무가 잎을 버리는 행위는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생명의 에너지를 가장 밑바닥, 그 근원으로 되돌리는 치열한 생존 전략이기 때문이다.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부물운운 각복귀기근(夫物芸芸 各復歸其根)'이라 했다.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나지만, 결국은 제 뿌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여름내 잎과 가지 끝으로 뻗어나갔던 수액들은 찬 바람이 불면 다시 뿌리로 하강한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정지靜止가 아니라 생명의 본질을 회복하는 고요한 역동이다. 뿌리가 튼튼해야 다가올 혹한을 견디고 내년의 봄을 기약할 수 있다. 그러니 가을은 겉치레를 벗고, 삶의 뿌리를 단단히 다져야 하는 시기다.
우리는 종종 이 자연의 섭리를 잊고 산다. 삶의 부피를 늘리고, 가지를 넓히는 것에만 골몰하느라 정작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얼마나 메말라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다. 눈에 보이는 성과와 타인의 시선이라는 화려한 잎사귀에 취해, 정작 내 삶의 근본인 '나 자신', '가족', 혹은 '삶의 가치'를 등한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을 숲이 보여주는 붉은 소멸은 그래서 처연하면서도 아름답다. 나무는 본체本體를 살리기 위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자신을 기꺼이 잘라내고 그 자양분을 뿌리로 보낸다. 그것은 "지금 당신이 쥐고 있는 것 중, 본질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지금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가을의 비움은 '허무虛無'가 아니라 '본질로의 회귀'다. 군더더기를 덜어내야만 비로소 알맹이가 남고, 잎을 떨궈야만 뿌리가 보인다. 이제 우리는 한 해의 결실을 셈하고, 다가올 끝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에 서 있다. 높고 푸른 하늘을 보며 겸허함을 배우고, 땅으로 돌아가는 낙엽을 보며 나의 근원을 되돌아볼 때다.
이 가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나의 삶에서 털어내야 할 잎사귀는 무엇이고, 내가 기어이 지켜내고 돌아가야 할 나의 뿌리는 무엇인가. 소란스러운 세상의 소음을 잠시 끄고, 내면의 깊은 뿌리를 들여다볼 일이다. 모든 것이 뿌리로 돌아가는 이 때, 우리는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삶의 무게중심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