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예측할 수 없는 무력한 순간을 맞닥뜨린다. 자연재해, 화재, 예기치 못한 사고, 혹은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일처럼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은 우리의 삶을 순식간에 뒤흔든다. 그렇게 우리는 가까웠던 사람을 잃고, 남겨진 자로서 다시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떠안는다. ‘그때 내가 여행을 말렸더라면…’, ‘혹은 그때 옆에 있어 주었다면…’, ‘한 번이라도 더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그 모든 후회와 자책은 되돌릴 수 없음을 알면서도 떠나지 않는다. <룩백>은 바로 그런 마음속의 가정들—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슬프고 헛된 회상들—속에 갇힌 사람들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네는 영화다.
<체인소 맨>으로 유명한 후지모토 타츠키의 단편 만화 <룩백>을 애니메이션화한 이 작품은 특히 '등'이라는 신체 부위를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창작자에게 등은 곧 노동의 증표이자 세계와 마주하는 방식이다. 만화가와 애니메이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창문 쪽에 붙은 책상 앞에 앉아 보내며, 그들의 창작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등을 보인 채’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인 <룩백>은 다층적으로 읽힌다. 창작자의 등을 ‘보라’는 의미의 문자적 시선, 뒤를 돌아본다는 영어 표현의 어감, 지나간 시간을 회고한다는 정서적 의미가 서로 겹쳐진다.
<룩백>의 주인공 후지노는 만화 그리기를 좋아하는 초등학생이다. 학급 신문에 4컷 만화를 실고 있는 그녀의 자부심은 대단한데, 옆 반의 히키코모리 학생의 작품이 같이 실리면서 비교 대상이 되며 경쟁자가 된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그림 실력은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하다. 별다른 내용이 없는 배경 그림이지만 후지노의 의지를 불태우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경쟁자의 실력도 일취월장하고 있어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자 중도 포기하게 된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졸업장을 전해 주러 간 후지노는 처음으로 경쟁자인 교모토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이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미묘한 경쟁을 넘어 서로의 결핍을 채워 주는 동료 관계로 진화한다. 캐릭터와 이야기 구성이 강점인 후지노와 배경 데생에 뛰어난 교모토는 만화라는 작업 안에서 이상적인 협력자가 된다. 두 사람이 이름을 합쳐 하나의 만화가로 데뷔하는 순간, 창작의 시너지는 비로소 완전해진다.
원작자인 후지모토 타츠키는 <룩백>의 창작 동기에 대해 동일본 대지진 이후 복구 현장에서 경험한 절망감을 언급한 바 있다. 아무리 치워도 끝이 보이지 않는 흙더미 앞에서 느낀 무기력함. 그리고 2019년 발생한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은 작품의 비극적 사건을 구성하는 직접적 모티프가 되었다. 결국 작품은 '인간은 원래 무기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이유 없는 폭력 앞에서 인간은 종종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룩백>은 현실에 무력한 창작자의 힘겨운 투쟁기이다.
그렇기에 <룩백>은 만화가와 애니메이터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창작자들을 향한 작품이다. 한국 개봉 이후 SNS에서 특히 웹툰 작가들의 호응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창작은 언제나 고독하고, 마감은 잔인하며, 평론가와 대중의 비판은 때로 버틸 수 없을 만큼 가혹하다. 그런 순간, 같은 영역에서 고군분투하는 동료는 가장 큰 버팀목이 된다. 후지노에게는 교모토가 그런 존재였고, 교모토에게 있어서도 후지노가 그런 존재라 할 수 있다. 교모토에게 있어서 후지노가 등에 써 준 사인은 골방에서 작업을 하는 그녀에게 크나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휴재를 선언했던 후지노가 다시 만화를 그리게 하는 원동력도 시공간을 넘어선 교모토의 4컷 만화이다. 후지노가 작업실로 돌아와 유리창에 교모토의 4컷 만화를 붙이며 팔을 걷어붙이는 건 당신의 창작이 어떤 이유에서라도 중단되지 말고 이어져야 한다는 단호한 충고이며 응원이다.
영화의 마지막, 후지노가 교모토의 집에서 돌아와 연재를 중단했던 만화를 다시 그리는 장면에서조차 등받이 의자를 옆으로 살짝 돌려 후지노의 등을 보여 주려는 연출자의 의지가 보인다. 엔드크레딧이 올라가며 시간은 흐른다. 이제 밤이 된다. 원 테이크로 구성된 이 엔드크레딧 장면은 시간의 흐름과 주인공의 의지를 보여 준다. 긴 하루가 지나 작업실을 나서는 후지노를 작업실 유리창으로 비추어 보여 주는 연출은 이 애니메이션이 원작을 뛰어넘는 작품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를 되감아 처음 장면을 떠올린다. 어린 후지노는 자기 방 책상에서 등지고 열심히 만화를 그린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창작에 몰입되어 있는 저 작가의 등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작품이 실패해도 괜찮다. 공모전에 낙선해도 괜찮다. 누군가 졸작이라고 손가락질해도 괜찮다. 당신에게는 아름다운 등을 가졌던 한순간이 남기 때문이다.
“계속 그려라. 어떤 일이 있어도.”
K People Focus 모하지 칼럼니스트** (mossisle@gmail.com)
영화와 음악을 사랑하며 아이들에게 독서와 글쓰기를 가르치는 희망의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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